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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암은 자기 묘에 비석도 세우지 말며 아무런 치장도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박연암의 무덤에는 상돌 하나 놓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그 묘가 누구의 묘인지 모르면서도 대감묘라 부르면서 봄가을 정성껏 성묘를 했고 또 자기 집에 환자가 생겨도 이 묘에 와서 병이 낫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195512월 김일성 주석은 <사상사업에서 교도주의와 형식주의를 극복하고 주체를 세울 때 >라는 연설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잘 알고 그것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전쟁시기 자신이 어느 인민군 휴양소에 가보니 풍경화를 걸었는데 시베리아의 눈 덮인 곳에 백곰의 그림이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 금강산, 묘향산 등 경치 좋은 곳이 많은데 그런 풍경화는 걸어 놓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학굔들에 가보니 뿌쉬낀 아니 마임증스끼 같은 외국 사람의 초상화는 걸려 있는데 연암 박지원이나 다산 정약용 등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의 초상화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연설이 있은 후 연암 박지원에 대한 소개 선전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 박산운 시인이 박지원은 자기의 선조인데 어려서 부모를 따라 개성에 와서 박연암의  묘을 찾은 적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 근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리하여 문예총 중앙위원회에서는 박연암 묘를 확인하는 사업을 하였다.
황토고개에 와서 박연암의 묘라고 인정되는 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 노인들에게 묘주가 누구인가 물었더니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다만 전해오는 말이 '서울대감의 묘라는 것 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묘에는 반드시 지석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봉분을 파보니 아니나다를까 거기에는 상당히 큰 지석이 있었는데 뚜렷이 박지원묘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리하여 박지원의 묘를 확인했다.
그 후 문예 총에서는 묘를 왕릉 못지 않은 호화무덤으로 꾸리였다 봉상도 더 우람차게 만들고 묘 둘래 에 화강석 판석으로 병풍석도 들렀고 두껍고 큰 상 돌도 놓고 비석을 괴임석 위에 상당히 크게 세웠다. 또한 묘 가까이에 아담한 정자도 지어놓았다.
그 후 이곳으로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과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박연암 묘지는 하나의 새로운 유원지로 되어 휴식 일이나 명절날에 이곳에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품위 있게 개건 된 박연암의 묘는 1960년대 말부터 차츰 버림을 받게 되었다.

당시 당중앙위원회의 지도적 지위에 있던 박금철 김도만 등이 주체를 세운다고 하면서 복고주의적으로 나갔다. 이들은 다산의(목심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정하고 의무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했다. 주체를 세우며 민족성을 살린다 하면서 결혼식도 옛날 식으로 남자들은 사모관대로 차려입고 여자들은 큰 머리에 쪽 도리 쓰고 활옷을 입혔다. 그리고 신랑은 말을 타고 신부는 가마를 타게 하였다.
이렇게 복고주의적 경향이 심해지자 김일성 주석은 이를 비판하면서 민족유산을 계승발전 시킴에 있어서 복고주의를 경계하며 시대 정신에 걸맞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복고주의의 반대, 봉건유교사상 반대라는 구호를 들고 또 좌경으로 나갔다. 이 바람에 연암의 묘는 차츰 냉대를 받게 되었으며 여기에 배치되었던 관리선 편례도 없애버렸다.
이렇게 되자 복고주의 반대 광신자들은 묘를 개건 하면서 잘 다듬어 썼던 석재를 떼어가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병풍석도 떼어가고 상 돌도 갈라갔다. 비석도 나뒹굴고, 아담하게 지었던 정자의 마루바닥도 뜯어가고 심지어 기와까지 벗겨가서 정자는 볼품 없이 되었다가 그 후 기둥도 돌보지 않아 다 없어졌다.
이렇게 되어 호화무덤으로 꾸며진지 10 여 년 만에 묘는 황폐화되었다. 차라리 개건 하기 전의 소박한 금잔디로 덮여 있던 아담하던 무덤 모습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복고주의 반대 봉건유교사상 반대 바람에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고 없어졌다.

 

1999김정일 개성 을 찾았을 때 유명인 묘들을 단장하라는 명령에 따라 황진이 의 묘와 함께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

위의 글은 송경록이 지은 <북한 향토 사학자가 쓴 개성 이야기> 중에서 연암 박지원에 대한 글만 올린 글이다

다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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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원 묘 정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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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람님의 댓글

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 현재 개성에 있는 연암 박지원 묘
2 박제순의 손자 독립운동가 박승유
3 애국지사 박승유 묘
4 공신 금릉군 박필건 초상  현재 모스코바박물관에 소장
5 금릉군 박필건 공신록
6 연암 박지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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