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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공 박태보 관직 정정 요청 과 처리답신

페이지 정보

박창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4:15 조회2,0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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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공 박태보 관직 정정 요청 과 처리답신
1019 문의 re정재공 박태보 관직 정정 요청 새글 pcs1319 2008.03.25 bul_rec4.gif 2

 
경기도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2008.2.29일 의정부시, 박세당 선생 유적 발굴 조사를 위한 개토제에 김문수 지사 님께서 직접 참석하시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반남박씨족보 홈을 관리하는 운영자 박창서 입니다.
의정부시 장암동 146-1 수락산에 위치한 경기도 기념물 제 41호인  노강서원에 모셔진 정재공 박태보(朴泰輔) 할아버님의 후손으로서 경기도에서 기념물로 지정하여 주시고 관리하여 주심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노강서원 안내 간판에 쓰여진 정재공의 관직이 "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로 벼슬을 올려 받게되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증 영의정"입니다.
다른 특별한 규정이 있어서 이조판서로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특별한 규정이 없이 잘못 표기된 것이라면 이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ttp://cafe.daum.net/bannampark
              pcs13191@hanmail.net
               카페지기 박창서 올림
   
 
 

조선왕조 실록

경종 3년 10월 29일(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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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13권, 3년(1723 계묘 / 청 옹정(雍正) 1년) 10월 29일(을해) 3번째기사

영의정 박태보·좌의정 윤증에게 시호를 내리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박태보(朴泰輔)에게 문렬(文烈)이란 시호(諡號)를, 좌의정(左議政) 윤증(尹拯)에게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4장 A면


【영인본】 41책 304면


【분류】 *인사(人事)

  



景宗 13卷, 3年(1723 癸卯 / 청 옹정(雍正) 1年) 10月 29日(乙亥) 3번째기사

증 영의정 박태보·좌의정 윤증에게 시호를 내리다






○賜贈領議政朴泰輔謚曰文烈, 左議政尹拯謚曰文成。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4장 A면


【영인본】 41책 304면


【분류】 *인사(人事)

 

박태보(朴泰輔) [한국학]
생몰년 : 1654-1689 시대 : 조선 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박태보(朴泰輔)에 대하여

박태보(朴泰輔)
1654(효종 5)∼1689(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나주).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당(世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백부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 부수찬·수찬·부교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문묘 승출(陞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환수를 청함에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여나갔던 바도 있다.
이어 응교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는데, 그가 부임하여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갔다 하여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적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해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하였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豊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 《주서국편 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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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3.18. 박창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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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scRIPT>scRIPT>
 
 
   안녕하세요. 경기문화재단에 문의하신 내용에 대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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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날짜 |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오후 15시 38분 25초 +0900
보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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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받는주소 | <ydkim@ggcf.or.kr>
받는이 | <pcs131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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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서님 안녕하세요? 경기문화재단입니다
경기문화재단 "민원상담실" 에 질문하신 내용의 답변입니다
mail_i.gif 문의일 : 2008년 03월 25일
mail_i.gif 답변일 : 2008년 0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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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내용 : 정재공 박태보 관직 정정 요청
정재공 박태보 관직 정정 요청

경기도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2008.2.29일 의정부시, 박세당 선생 유적 발굴 조사를 위한 개토제에 김문수 지사 님께서 직접 참석하시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반남박씨족보 홈을 관리하는 운영자 박창서 입니다.
의정부시 장암동 146-1 수락산에 위치한 경기도 기념물 제 41호인 노강서원에 모셔진 정재공 박태보(朴泰輔) 할아버님의 후손으로서 경기도에서 기념물로 지정하여 주시고 관리하여 주심에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노강서원 안내 간판에 쓰여진 정재공의 관직이 &quot;그의 충절을 기려 이조판서로 벼슬을 올려 받게되었다&quot; 라고 되어있습니다.
저희들이 조사한 바로는 &quot;증 영의정&quot;입니다.
다른 특별한 규정이 있어서 이조판서로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특별한 규정이 없이 잘못 표기된 것이라면 이를 바로 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ttp://cafe.daum.net/bannampark
pcs13191@hanmail.net
카페지기 박창서 올림


조선왕조 실록
경종 3년 10월 29일(을해)
○ 햇무리하다
○ 윤순·송진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증 영의정 박태보·좌의정 윤증에게 시호를 내리다
경종 13권, 3년(1723 계묘 / 청 옹정(雍正) 1년) 10월 29일(을해) 3번째기사
증 영의정 박태보·좌의정 윤증에게 시호를 내리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박태보(朴泰輔)에게 문렬(文烈)이란 시호(諡號)를, 좌의정(左議政) 윤증(尹拯)에게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4장 A면
【영인본】 41책 304면
【분류】 *인사(人事)
景宗 13卷, 3年(1723 癸卯 / 청 옹정(雍正) 1年) 10月 29日(乙亥) 3번째기사
증 영의정 박태보·좌의정 윤증에게 시호를 내리다

○賜贈領議政朴泰輔謚曰文烈, 左議政尹拯謚曰文成。
【태백산사고본】 7책 13권 14장 A면
【영인본】 41책 304면
【분류】 *인사(人事)

박태보(朴泰輔) [한국학]
생몰년 : 1654-1689
시대 : 조선
분야 : 문신/관료 &gt; 문신-조선중기 &gt; 문신
박태보(朴泰輔)에 대하여
박태보(朴泰輔)
1654(효종 5)∼1689(숙종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나주).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당(世堂)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백부인 세후(世垕)에게 입양되었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생원으로서 1677년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을 때 시관(試官)으로 출제를 잘못하였다는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선천(宣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1680년 부수찬·수찬·부교리·지평(持平)·정언(正言)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이때 문묘 승출(陞黜)에 관한 문제와 당시 이조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질책한 상소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그뒤 서인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그의 환수를 청함에 1682년 홍문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 사가독서를 마치고 나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호남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뒤에 중앙에 보고한 과감한 비리 지적에 조정의 대신들이 감탄하였으며, 호남지역의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당시 서인 중에서 송시열(宋時烈)과 윤선거(尹宣擧)가 서로 정적으로 있을 때, 윤선거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친족관계라는 사심을 떠나 공정하게 의리에 기준을 두고 그 옳고 그름을 가려 통쾌하게 논조를 전개하여나갔던 바도 있다.
이어 응교를 거쳐 파주목사로 나갔을 때, 조정에서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어버렸는데, 그가 부임하여 재직하는 파주에서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이를 존속시켜나갔다 하여 인책, 면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재주가 뛰어나서 젊은 나이에 장원급제를 한 경력이 있으며, 학문적인 태도도 깊고 높아 당대의 명망 있는 선비들과도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교유한 친우는 주로 서인의 소론파들로 최석정(崔錫鼎)·조지겸(趙持謙)·임영(林泳)·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이 있다. 타고난 성품도 뛰어나 지기(志氣)가 고상하고 견식이 투철하여 여러 차례의 상소를 통해서 보여준 바와 같이 시비를 가리는 데는 조리가 정연하고 조금이라도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으며 의리를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왕은 곧 후회하였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려문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계사(豊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정재집》 14권, 편서로 《주서국편 周書國編》, 글씨로는 박임종비(朴林宗碑)·예조참판박규표비(禮曹參判朴葵表碑)·박상충비(朴尙衷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2008.3.18. 박창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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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내용
pcs1319님 안녕하세요.

먼저 요청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처리하여 드렸습니다.
보시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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