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 문강공 박소(朴紹)와 현량과(賢良科
페이지 정보
본문


어제는 오랜만에 대종중에서 교양강좌가 개최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년 3∼5회가 열리는데
새로운 임원이 들어서서는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내용도 좋고 강사님도 좋은 분을 모셨다. 한문을 전공하시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으로 종중에 많은 도움을 주실분으로 생각된다.
강의는 “자운서원(紫雲書院) 원규(院規)” 강사님은 호군공파 박도균(朴燾均=天均)
자운서원은 이이(李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그 뒤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사원의 원규(서원을 운영하는 규칙)를 문순공께서 작성하셨다고 한다.
교제, 문강공 박소 할아버지의 내용중에 공(公)께서
1518년(중종 13) 향공(鄕貢) 3과에 모두 장원하고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일찍이 현량과에도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1519년 식년 문과에 장원하였다.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라고 되어 있는데 마치 공(公)께서 현량과에 낙방(落榜)하신 것처럼 보인다.
중종 14년(1519년), 같은해 식년시(式年試)와 현량과(賢良科) 과거가 있었다
식년시(式年試)
중종실록35권, 중종 14년 3월 20일 계축 3/3 기사 /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문과의 전시를 출방하였는데, 박소 등 29인을 뽑다
조광조가 천거헌 현량과(賢良科) 는
중종실록35권, 중종 14년 4월 13일 병자 1/4 기사 / 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천거한 선비를 시책하여 장령 김식 등 28인을 뽑고, 무인 정인 등 46인을 뽑다
○丙子/上御勤政殿, 策薦擧士, 取掌令金湜等二十八人; 幸慕華館, 試武人, 取鄭麟等四十六人。
공(公)께서 급제를 하신 식년시(式年試)는 3월 20일 실시되고,
23일후에 조광조가 천거(薦擧)한 현량과는 4월 13일에 실시하였기에
‘현량과에 급제하지 못하고’는 사실이 아니다.
이런기록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올라있고.
문강공의 잘못된 기록이 또 있다
공께서 ‘합천의 이연서원(伊淵書院), 나주의 반계서원(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합천의 이연서원이 아닌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런 잘못된 기록을 수정할수 없는지?
종중에 반남박씨종사(潘南朴氏宗史)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들어난다.
종중의 역사를 정립할수 있는 종사연구하는 기관이 필요한데,
종중역사 바로 세우기 연구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此日彼日 미루고만 있다,
시제(時祭), 새롬빌딩 문제로 바뻐서란 핑계다.
세양공 신도비 비문에 의문점이 많은 것은 옛날에 발행한 오류가 많은 ‘반양삼세현창록’을 참고로 했다고 하는데
종중에 제대로 확립된 종사에 대한 문서가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족보에 잘못된 기록, 어찌할것인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