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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 부자 · 부부 독립운동가 가족 박찬익 박영준 신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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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한가람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12-26 10:10 조회1,922회 댓글0건

본문

박찬익  오창공파

박찬익.png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서 박봉서(朴鳳緖)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4년 상경하여 상공학교 동기생 박원호의 추천으로 보안회에 가입하여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안에 대한 반대투쟁에 참여하였다.

1907년 초에는 비밀 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박호원 등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야학을 조직하였다.[1]

 

 

1908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연길에서 간민교육회를 조직, 부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1918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김동삼,조소앙,이동녕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1]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4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되었다.

19213월 임시 정부 후원회를 조직하였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하였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하였다.[1]

 

 

특히 중국 국민당의 쑨원이 광동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데 기여하였으며,

19222월에는 광동에 주재하여 호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1926931일 침체되어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 정일우 등과 귀일당을 조직하였다.[1]

 

 

임시정부 활동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193010월 중국 국민당 제 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임시정부를 가흥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하여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1932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하여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하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하던 유인발 등을 적발,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였다.[1]

 

 

이후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왔다.[2]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하였다가[1]

6월경부터 박찬익은 한국국민당의 자금관리 문제를 김구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박찬익은 김구와 불화가 생겼고, 더욱이 자금운영문제로 의심을 받자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3]

19387월 이시영, 이동녕 등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되었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광복시까지 임시 정부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10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으며,

19435월에는 김구, 홍운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1]

 

 

해방후

19458.15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장으로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하였다.

19462월 한국독립당 중국 총지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1947년 중국국공내전 상황에서 한인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계획서를 중국 당국에 제출 승인받아 동북행영 장연지구에 보병독립총대를 설치하였다.

19484월 김구의 남북협상을 위한 월북을 만류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로 귀국하였으며,

1948년 말에는 정치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김구의 은퇴를 권유하기도 하였다.

 

 

사후

194939일 서울 창신동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311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박영준

박영준은 1915111일 중국 용정시에서 독립운동가박찬익4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라다가 15살 때인 1930년 상하이로 가서 부친과 재회했다. 이후 1938년 부친의 지시를 받고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항일연극과 강연, 합창, 그리고 전단을 배포하는 등 반일사상의 고취와 함께 초모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3911월 중경(重慶)에서 임정의 인재양성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 교통과에 입교하였으며, 194112월에 중국중앙군관학교 제17기를 졸업하였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에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자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의 부관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어 참전한 한국사병들을 초모하기에 진력하여 다수 학병과 지원병 및 징집병을 포섭하고 이들을 훈련시켜 중경(重慶)의 총사령부로 보내어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배치시켰다.

19424월부터는 상위(上尉)를 맡아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 배속되어 근무하였으며, 19431월에는 임정 한인청년회 문화부장으로,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총사령부 서무과장으로 근무했다. 이해에 신건식의 딸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순호와 결혼했으며, 19446월에는 이시영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정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 근무하였다.

1945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8월에는 개봉 지구로 파견되어 그 곳에서 광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후 만주로 가서 대한민국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자위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8.15 광복후 중국에 남아서 현지 한국인을 보호하며 그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주선한 그는 1948년 귀국 후 그해 12월 국군 소령으로 임관했다.

6.25 전쟁
이 발발하자 육군 장교로 참전한 그는 1952년 초대 정훈감을 지냈으며, 1961년 한국 전력 사장에 임명되었고 1963년 군직을 퇴임했다. 이후 광복군 동지회장, 백범기념사업회장을 역임했으며, 2000327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영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0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신순호

1922년 충북 청원에서 태어난 여사는 19388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중국과 합동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19409월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자 오광심 김정숙 조순옥 여사 등과 함께 여군으로 광복운동에 참가했다.

1942년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19438월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로 전보돼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여사의 남편인 박영준 선생도 광복군 제3지대에서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한 애국지사다.

정부는 여사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수여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박천기씨와 딸 천민(교사), 사위 이홍권(변호사)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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