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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 ★ 贈우의정 일두 정여창의 처 정경부인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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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允中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8-25 04:41 조회1,7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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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1] 우의정 일두 정여창 (鄭汝昌 1450 ~ 1504)

 

일두 정여창은 성균관 문묘에 서배향 3위로 모셔져있는 동국18현 중의 한 분이다. 한훤당과 함께 김종직에게 배웠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 때에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서 1504년에 죽었는데, 같은 해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고, 중종반정 이후에 복권되어 1517년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당시에 살아있던 부인 완산이씨는 정경부인을 제수받았는데, 1523년 실록에 세사미의 지급여부를 논한 기록이 있다. 부인의 묘는 정여창의 묘 위쪽에 따로 모셨다.

b66116a7f1e1eddf64fe1117f9e5ffef_1692906006_9273.png-: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남계서원 북북동2.9km) 


1450년 경상남도 함양(咸陽)에서 출생하였다. 본관 하동(河東), 자 백욱(伯勗), 호 일두(一蠹), 시호 문헌(文獻)이다. 조선 전기 신진사림의 거두이자 영남학파의 종조로 일컫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으며,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83(성종 14)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고 1490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소격서 참봉이 되었다. 같은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안음현감(安陰縣監)을 지냈다. 1498(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화를 입었는데 당시 사초에 기록된 내용을 제대로 고하지 않았다고 파직되어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1504년에 사망한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進修雜著)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애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정문헌공실기(鄭文獻公實記)속에 전할 뿐이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 때 문묘에 배향되고 나주(羅州)의 경현(景賢)서원, 상주(尙州)의 도남(道南)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있다. 1570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두산백과 - 정여창 [鄭汝昌]

 

國朝寶鑑卷之十九 / 中宗朝 丁丑十二年

秋八月命贈金宏弼鄭汝昌右議政朱溪副正深源贈君旌閭三人皆金宗直門徒被禍於燕山甲子至是趙光祖以爲言

 

중종실록 12(1517) 86

김굉필정여창의 자손을 녹용하도록 전교하다

정원(政院)에 전교하였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다 어진 사람이다. 그 자손의 녹용은 다른 주죄(誅罪)된 사람의 자손의 예()와 같이 할 수 없으니, 각별히 녹용해야 한다. 관작(官爵)을 포증(褒贈)하고 처자를 존휼(存恤)하는 등의 일도 아울러 승전(承傳)을 봉행하라.

 

중종실록 18(1523) 35

김굉필의 처자에게 계속 세사미를 주도록 하다

좌의정 남곤(南袞)이 의논드리기를,

"김굉필(金宏弼) 등 세 사람 정성근(鄭誠謹)과 정여창(鄭汝昌)이다.의 일은 신이 전에 이미 다 말씀드렸습니다. ~중략~ 상이 남곤의 의논을 따르고, 이어 전교하기를, "김굉필 등의 처자에게 세사미를 주는 일은 대간이 여러 날 논계하였고, 저번에 경연에서 재상이 역시 미편하다고 하므로 의논한 것이다. 유학을 숭상하고 절의를 높이는 일은 과연 아뢴 바와 같다. 지금 만약 고친다면 일이 번거롭게 되고 더구나 벼슬을 준 것은 비석에 썼으니 추탈(追奪)함은 더욱 불가하다." 하였다.

  

세계원류(世系源流)

[출처] 일두집(一蠹集) 일두속집 제4/ 부록(附錄)

정씨(鄭氏)는 그 선조가 하동부(河東府) 사람이다. 선생의 증왕고(曾王考) 종부시 정(宗簿寺正) 지의(之義)가 비로소 함양군(咸陽郡)에 살았다. ~중략~

육을(六乙) - 국사(國史)에는 을() 자가 일() 자로 되어 있다. 우리 세조(世祖) 정해년(1467, 세조13)에 함길도 병마우후((咸吉道兵馬虞候)로 적신(賊臣) 이시애(李施愛)의 난리에 절의를 위하여 죽어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추증(追贈)되었다. ~중략~

六乙 國史乙作一我世祖丁亥以咸吉道虞侯立殣於賊臣施愛亂贈漢城府左尹

- 여창은 바로 선생이다. 선생의 사적은 국조유선록(國朝儒先錄)사실대략(事實大略)에 실려 있다. 묘는 승안 고묘(考墓)의 왼쪽 기슭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니, 도평군(桃平君) 이말생(李末生)의 따님이며, 정종대왕(定宗大王)의 후손이다.묘는 공의 묘 위쪽 간좌에 있다. -

汝昌卽先生先生事蹟載在國朝儒先錄及事實大略昇安考墓左麓艮坐貞敬夫人完山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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