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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활당공이 읽으셨던 대학 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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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송촌옹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5-12 13:24 조회768회 댓글2건

본문

跋活塘公所讀大學 乙巳(1665) 二月十九日 현석(玄石) 세채(世采) .

 


세상에서 말하기를, 동방에 처음으로 성리학이 흥기할 때는 대개 고려의 끝머리이다, ()선생 목은(牧隱)과 제공(諸公)이 창도하실 때로, 그중에 포은(圃隱), 우리 선조이신 반남(潘南)선생이 계셨으니, 그 학문이 비등하시어, 일시에 뛰어나셨는데, 을묘년(乙卯年)에 중흥시킨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동반(同伴)으로 교관(敎官)이셨다.

그리고 차례로 정공(鄭公)과 화해(禍害)를 입으심은, 고려(高麗)를 보좌하심이 단서가 됨이니, 은택을 입으심에 있는 것이다.

이제, 오늘날 도에 그 말이 들리는 것은, 우리 조선(朝鮮)이 성립되는 중에도, 성화(聖化)가 멈추지 않고 미치어, 학문하는 선비가 울연(蔚然)하게 배출되니, 한훤(寒喧)이 그 영광을 입었고, 근원은 깊고 후학이 무성함은, 원류가 멀리서 흘러 내려와 더욱 번성함이어라,

 


그를 사숙(私塾)하는 문도들에는, 세상에서 호칭하는 거유들이 많으니, 약간만 헤아려도, 정암(靜菴)과 모재(慕齊), 송당(松堂)이 있으니, 즉 그 사람들이다. 나의 고조이신 야천(冶川)선생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시어, 스승이며 벗이신 송당(松堂)과 모재(慕齊)에게 배우셨고, 대과(大科) 때에는 정암(靜庵)과 제공(諸公)의 추천을 받으셨더라. 후에 회재(晦齋) 이문원공(李文元公)과 더불어 동궁(東宮)의 인종(仁宗)을 계도하여 가르치시니, 나날이 성덕이 더하시었다.

미기에, 김안로(金安老)가 적소(謫所)에서 풀려 날때에 화해(禍害)를 당하시고, 영남(嶺南)으로 물러가 몰()하셨으니 오호, 어렵고도 어렵도다. ()를 행하기가 이렇게 지난 함을.

먼저 자신을 바로잡은 후에, 가솔(家率)을 예()에 이르게하고, ()을 좋아하여 그 안에 머물며, 표리(表裏)가 여실하여 신자(紳者(朝臣))들 중에 이름을 떨친 분은, 그 아드님이신 남일공(南逸公)과 적손(嫡孫)이신 뢀당공(活塘公)이니, 능히, 선조(先祖)의 웅지(雄志)를 잃지 않고 계승하셨음이라.

 


나날이 면학(勉學)에 힘써서 학문을 높이고, 행실을 신실(信實)하게 하며, 현자(賢者)는 존숭(尊崇)하고, 벗을 사귐에는 괴로움을 함께하셨다. 부지런히 학문을 갈고닦아, 조정에 임하여 정직함을 말하고, 의론에는 직도(直道)에 머무시니, 이에 모든 것을 갖추고 구비하시어, 소위, 더 할 것 없는, 진실로 선도(先導) 하시리라.

 


차례로 병란을 당해, 경전(經典)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남겨진 문서나 서적도 흩어져 없어질까 위태로운데, 근래에 듣기를 활당공이 읽으시던 오래된 책 대학한 권이 남아있어 볼 수가 있었으니, 손수 검열 비교하시며 적어가신 붉은 먹물의 찬란함에, 세채(世采)는 무릎 꿇고 우러르며 받쳐 들고, 거듭거듭 찬탄하였나니, 어찌, 높으신 승경(勝景)을 사모하지 않으랴.

이제 조심하고 경계하여, 그 뜻을 받드는 자는 나와 함장(函丈(師弟))간이니, 능히 그 힘을 다하여 가학(家學)을 이어받았고, 이제는 남일공(南逸公

댓글목록

宗緖(倉守公后)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宗緖(倉守公后)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世稱東方理學之倡
세상에서 일컫는 동방 성리학의 번창은
蓋自麗季牧老諸公而圃隱爲之首
고려말 목은 이색과 점잖은 여러분들로 부터였고, 포은 정몽주가 으뜸이었다.
我先祖潘南先生並生一時其學相埒
우리 선조 반남선생이 나란히 같은 시기에 나와서, 그 학문의 경지가 버금갔다.
遂同掌敎泮宮至乙卯樹立
마침내 을묘년(1375) 수립할 때까지 함께 성균관의 교육을 관장하였다.
且與鄭公長弟罹禍
또한, 정공의 큰 동생과 더불어 죄에 걸렸는데
則其所以麗澤交輔者
인접한 연못이 서로 윤택하게 하듯이(여택) 사귀고 도와줬던 것은
必有端緖而今不可得聞矣
반드시 무슨 실마리가 있는 까닭이나, 이제는 들을 수가 없다.
逮我朝成之際聖化休明
우리 조정이 세워진 즈음에 미쳐서, 성인(임금)의 교화가 뛰어나고 분명해서
學問之士蔚然輩出而寒喧爲之冠
학문하는 선비가 무성하게 배출되어, 한훤당 김굉필이 으뜸이 되었다.
根深末茂源遠而流益盛
뿌리가 깊으면 잎(끝)이 풍성하듯, 근원은 멀리 흘러서 더욱 번성하였다.

목은 이색(1328~1396)
반남선생 박상충(1332~1375)
포은 정몽주(1337~1392)

한문을 배우는 입장에서 앞 부분만, 의역을 배제하고 직역해 보았습니다.

호우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호우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세상에서는 동방의 이학(理學, 성리학)을 창도한 이로 대개 고려 말엽의 목은 이색을 비롯한 제공들을 말하는데, 그 중 포은 정몽주를 제일로 일컫는다. 나의 선조 반남선생은 그와 같은 세상에 태어나시어 학문이 서로 비등하였다. 마침내 함께 성균관에서 가르침을 맡아 을묘년(1375)에 이르러 수립(樹立, 학문이나 도의를 이루어 세움)하였는데, 아울러 선생은 정공, 친동생 등과 함께 재앙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를 세심하게 살핀다면 선생이 포은 등 제공들과 교분을 맺고 이택(麗澤, 붕우들이 서로 도와서 절차탁마하는 것)의 도움을 주고 받은 단서가 반드시 있을 것이나, 현재로서는 찾거나 들을 수 없다.

우리 조선조에 이르러 국가가 갖추어질 즈음에는 성화(聖化)가 밝고 아름다운 때를 만났다. 이후 학문하는 선비들이 울연히 배출되었는데, 그 중 한훤당(김굉필)을 으뜸으로 삼는다. 뿌리가 깊어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멀어서 흐름이 더욱 성대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사숙하는 자제들 중 ‘거유(巨儒)’로 불리는 이들이 다수 배출되었는데, 정암 조광조, 모재 김안국, 송당 박영 등이 바로 그러한 인물들이다. 나의 고조부 야천선생은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송당, 모재와 사우(師友, 스승과 벗)가 되었으며, 정암 제공들에게 크게 추중(推重)을 받았다. 이후 회재 이문원공(이언적)과 더불어 주연(胄筵, 왕세자에게 학문을 강연하는 자리)에 나아가 가까이서 모시게 되었는데, 인종을 계도하여 성덕(聖德)이 날로 발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임인(壬人, 마음에 흉악을 품은 사람) 김안로에게 배척을 당한 뒤 영남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도가 행해지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 아, 슬프도다.

그 이후로도 우리 가문은 예를 따르고,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그 의표(儀表)는 모든 벼슬아치들의 본보기와 모범이 되었다. 야천선생의 아들인 남일공(박응남)과 더불어 그 적손(適孫, 맞손자)인 활당공(박동현)은 능히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더욱 학문에 힘을 쏟아 어진 이를 높이고 벗을 취하기를 스스로 독실히 힘썼다. 부지런히 글을 강송(講誦, 강독하여 욈)해 마지 않았고, 얼굴 빛을 엄숙히 하고 조정에 서서는 곧고 바른 의논과 올곧은 도를 간쟁하였다. 이는 모두 드러낼 만한 일로, 진실로 이른바 ‘그 선조들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고 할 만 하다.

다만 여러 번 참혹한 전쟁을 겪어, 유문(遺文, 유고)과 서적이 대부분 산망(散亡, 흩어져 없어짐)하였다. 근래에 듣자 하니, 활당공이 생전에 읽으시던 <대학(大學)> 한 권이 옛 집에서 홀로 보존되었다고 한다. 그 책을 살펴보니 주묵(朱墨, 붉은색의 먹)이 있고, 선인의 수택(手澤, 손 때 묻은 자취)이 찬연(粲然)하였다. 나 세채는 감개무량하여 그 책을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았다 하며 어루만지고는 반복하여 탄식하고 한탄하였다. 일찍이 공에 대해 높이 우러르던 생각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마치 함장(函丈, 선생)의 문하에서 몸소 삼가 가르침을 받드는 것 같았다. 또 나는 그 후손으로서 힘써 전해지는 가학(家學, 집안의 대대로 내려오는 가르침)을 전수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한스러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같은 집안의 조카 금창부위 박태정은 공의 증손자에 해당되며, 장차 남일공의 후사를 이을 것이다. 그가 허리에 공의 책을 끼고 나 세채를 찾아와 배움을 청하는 모습은 자못 부지런하였다. 나는 이윽고 그 뜻을 아름답게 여기어 그에게 두 선조를 배우기를 권면하였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404A_0680_010_0080  [남계선생박문순공문정집 제68권 / 제발(題跋) (번역 박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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