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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첨추공 휘 일원 선조님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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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송촌옹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4-13 00:32 조회7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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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조. 첨추공(僉樞公) 일원(一源). 숙이(肅而).

숙종 41 을미년(1715) ~정조 15 신해년(1791) 1114.

 


부군의 사적(事跡)은 대부분이 承政院日記에 나타나 있다. 朝鮮王朝實錄에는 별다른 기사는 보이지 않고 오직 외직인 아산현감(牙山縣監) 때에 체직(遞職)된 기사만 보일 뿐이다. 추관지(秋官志)탁지지(度支志)의 저술(著述)이 없었다면 의 이름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은 선고(先考通德公)가 요절(夭折)한 해인 숙종(肅宗) 을미년(1715)에 한양(漢陽) 외가에서 태어나셨다.

그리고 10살 되던 영조 을사년(1725)에는 어머니 이부인(李 夫人)마저 돌아가 고아가 되셨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경주인(慶州人) 이한곤(李漢坤)의 따님으로,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이며 이조판서인 이인엽(李寅燁)의 손녀요, 좌의정 이경억(李慶億)의 증손녀이다.

좌의정의 장남인 이인소(李寅熽)에게 출가한 분이 참판공(參判公世周)의 큰 따님이니. 어머니 이씨(李氏)는 종조모(從祖母)의 본가(本家親庭)로 출가(出嫁)하신 것이다.

은 고아(孤兒)가 되어 외가(外家)에서 생장하셨다. 외가(外家)인 좌의정 이경억(李慶億) 가문(家門)은 당시에 만권(萬卷)의 장서(藏書)로 소문이 난 가문이다. 그 장서들을 마음껏 두루 읽으며 성장하여, 정조(正祖)로부터 박문다식(博文多識)하고 문장(文章)에 능()하다.는 칭찬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누구에게서 학문(學文)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은 일찍이 27되던 해인 영조17 신해년(1741)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셨는데. 그 늦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承政院日記에서 부군에 관한 기록 중에는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당시의 일들이 여러 문장을 차지하고 있다.

부군이 45세 되던 英祖 36年 庚辰(1760) 128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경현당에서 그날 대사성에 오른 조명정(趙明鼎)에게 장의(掌議) 임면주(任冕周) 박일원(朴一源)과 색장(色掌) 이우규(李禹圭) 유한경(兪漢敬) 황순(黃栒) 김녕(金寧)을 거느리고 오게 하고, 부제학(副提學) 서명응(徐明膺) 대사성(大司成) 조명정(趙明鼎)등과 강토(講討)하게 하였다. [中略]

 


또 이틀 뒤인 1210일에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와 경연(經筵)에 임하여, 특진관을 입시하게 하고 관학 유생에게 어제와 같이 중용(中庸)을 전강(殿講)하게 하였다.

여러 유생의 진강이 끝나자. 임금이 강을 마친 유생을 보고저 연소한 유생은 누구인가?물으시니, 승지 유한준(兪漢肅)이 대답하기를 유한경(兪漢敬)이라 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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