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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첨추공 휘 일원 이야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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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송촌옹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4-13 00:13 조회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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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6 임인년(1782) 530, 임금이 성정각(誠正閣)에서 조정 대신들과 정사를 논()할 때에, 임금이 또 묻기를 박일원(朴一源)이 누구인가?하자, 원임영상(原任領相) 서명선(徐命善), 고 수찬(故 修撰) 박필중(朴弼重)의 손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제 추관지(秋官誌)를 밤늦도록 읽어 보았다, 읽으면서 혹시 빠진 곳이 있나 살폈는데 대체로 잘 지었다고 할 만하더라.하셨다. 서명선의 대답이 저도 그 찬지(撰誌)를 읽어 보았는데 간혹 유향(有鄕地方)의 사정에 어두운 곳이 있는데 이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임금께서 그의 고울 살이 정치는 어떠하였는가?하자, 서명선이 답하기를 그의 치적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추관지(秋官誌)를 사찬(私撰)한 일을 보면 문장력이 뛰어난 선비라고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을 내려 추관지를 보충하여 다시 고쳐 쓰게 하고, 이제 한성판윤(漢城判尹)의 책임 아래 경조지(京兆誌)도 찬성(撰成)하게 하라.고 하셨다.

이에 홍낙성(洪樂成)이 아뢰기를 판윤(判尹)이 반드시 선찬(善撰)할 것이고, 추관지(秋官誌)는 도합 다섯 권인바, 초출(初出)할 때 혹시 졸(소용없다)하게 여겨 빠트린 곳이 없나 잘 살피게 하겠습니다.하였다.

이튼 날인 61. 전 형조정랑(前 刑曹正郞) 박일원(朴一源)이 윤대(輪對)의 명을 받아 입시(入侍)하였다.

의 차례가 되어 탑전(榻前)으로 나오자 임금이 말하기를 추관지(秋官誌)를 잘 찬성(撰成)하여서 가상(嘉祥)하기가 극심(極甚)하다. 이 책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고 물으셨다.

이 대답하기를, 김노진(金魯鎭) 공이 형조의 판서로 있을 때에 시작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대체로 잘되었으나, 소루(小累)한 부분이 좀 있는 듯하다. 선왕들의 유훈(遺訓)이 빠져 있으니 찾아내서 내용을 더 보충하여 내용을 더 윤택하게 하면 좋지 않은가?하셨다.

이 대답하기를, 지금 본조 소속(刑曹所屬)의 각 사(各司)의 서고에 있는 자료는 있는 대로 찾아 찬출(撰出)하였으나 역시 빠진 곳이 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열조(烈祖)의 가르침 중에서, 받들어 본받을 유훈(遺訓)은 다 싣고, 금부(禁府)의 문서 중에도 본조에 속한 것은 채취하여 첨부添附)하여 기록(記錄)하면 더욱 빛이 나지 않을까? 그중 소속 관청의 자료는 엄정히 가려야 할 것이다.하고, 이어서 ()의 수령으로 나간 것은 몇 곳이나 되는가?고 물었다.

임실과 아산, 양 읍을 경유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임금이 아산에서는 무슨 연고로 체직(遞職)이 되어 돌아왔는가?하시자, 이 대답하길, 김시묵(金峙黙)이 어사로 호서에 내려왔을 때에 파면되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길나는 아직 그것(書啓)을 보지 않았다. 오늘은 특별히 부른 것이다. 이제 물러가라.고 하셨다. 承政院日記

 


임금으로부터 추관지의 부족한 몇 대목의 부분을 보완수정 하라는 임금의 영()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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