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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우금치(牛金峙)와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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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4-02 00:17 조회985회 댓글0건

본문

반남 박씨 22세 박제억 선조께서 우금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글을

읽었다. 그 숭고한 뜻을 기리며 글을 쓴다.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승리한 일본은 청국과의 시모노세키(하관-下關) 조약

을 통하여 요동(遼東)반도를 차지하게 되었으나 조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요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무력으로 위의 삼국에 대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러시아(구 소련 포함)이다.

러시아는 약 240년(1240~1280)동안 원나라 몽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일까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서방국가에 의해서 野蠻族(야만족) 내지 비유럽국가

취급을 받았다. 노예를 뜻하는 라틴어는 그대로 영어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

슬레이브(slave)가 되었는데 러시아와 그 주위의 동유럽 국가의 민족을 슬라브

(Slav)족이라고 한다.

 

영국의 유럽 대륙에 대한 정책을 흔히 세력균형 정책이라고 하는데 유럽 대륙

에서 어느 한 나라 특히 프랑스나 독일이 패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영국은 섬나라의 잇점(利點)을 최대 활용하여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 대영제국(大英帝國)이 된 것이다.

프랑스도 여기 저기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175~63년의 유럽과 북미(北美),

인도의 플라시 전투의 총칭인 7년 전쟁에서 영국은 독일(프러시아 또는 프로이센)

과 연합하여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의 연합군을

도처에서 격파하였다. 1898년의 이집트의 파쇼다에서도 프랑스는 영국에게

굴복하였다. 따라서 프랑스는 인도와 북미라는 핵심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세력 균형 정책의 좋은 예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1803~1815)년에 영국이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 격파한 것이고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의 보오전쟁(1866), 프랑스와의 보불전쟁(1870

~1871)에서 독일이 승리하자 그 이후 프랑스를 편들어 독일을 견제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트래팔가 해전(1805)에서 패하자 다음 해에 유럽 대륙 국가

가 영국과 통상하는 것을 막는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떠났다- 결국 추위로 실패했지만.

이때 잠시나마 영국이 러시아를 인정해주었고 러시아가 유럽 대륙의 중심국가인

양 프랑스에 반대하는 소위 신성동맹(神聖同盟)의 중심국가처럼 ‘껍쭉’대기도

했으나 튀르키예를 상대로 흑해를 통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1853~1856년의

크리미아 전쟁에서 영국, 프랑스에 막혔다.

 

다시 삼국간섭으로 돌아가면 이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이었는데

독일의 빌헬름 2세와 프랑스의 대통령 펠릭스 포르가 동조한 까닭이었다.

가장 큰 명목상의 이유는 황화론(黃禍論)으로 황인종의 강국이 출현을 막자는

것으로 백인우월주의(白人優越主義)이고 독일은 그 댓가로 중국의 산동(山東)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의 독일을 견제할 목적

으로 러시아와 동맹 관계이기도 하고 독일과의 긴장 관계를 완화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핵심 식민지인 인도의 방어를 위하여 이란과 심지어

조선에서도-1887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잠시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를 압박하였다. 또한 1935년 나치 독일을 견제할 목적으로 열린 스트레사

(이탈리아의 도시) 회의에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참석하고 소련의 초청하지

않아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분노를 샀다.

 

영국은 또한 황인종인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1904)에서도 일본을 편들었다. 이미

영국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었기도 하였다. 관심은 영국의 태도인데 물론 이

동맹은 1923년 완전히 폐기되기는 하였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의 영웅 칭호를 받는 맥아더는 미국의 언론이 유럽 전선

의 아이젠하워만을 크게 보도한다고 불평하면서 유럽에서는 ‘문명국가’ 간의 전쟁

이지만 아시아에서의 일본과의 싸움은 ‘야만인’과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태도나 태평양 전쟁에 대한 태도에 있어 미국과 영국의 우월의식

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반남 박씨 22세 박제억 선조께서 우금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글을

읽었다. 그 숭고한 뜻을 기리며 글을 쓴다.

 

1895년 청일전쟁의 결과로 승리한 일본은 청국과의 시모노세키(하관-下關) 조약

을 통하여 요동(遼東)반도를 차지하게 되었으나 조약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 의한 삼국간섭으로 요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무력으로 위의 삼국에 대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러시아(구 소련 포함)이다.

러시아는 약 240년(1240~1280)동안 원나라 몽골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일까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서방국가에 의해서 野蠻族(야만족) 내지 비유럽국가

취급을 받았다. 노예를 뜻하는 라틴어는 그대로 영어에 같은 뜻을 가진 단어

슬레이브(slave)가 되었는데 러시아와 그 주위의 동유럽 국가의 민족을 슬라브

(Slav)족이라고 한다.

 

영국의 유럽 대륙에 대한 정책을 흔히 세력균형 정책이라고 하는데 유럽 대륙

에서 어느 한 나라 특히 프랑스나 독일이 패권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영국은 섬나라의 잇점(利點)을 최대 활용하여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 대영제국(大英帝國)이 된 것이다.

프랑스도 여기 저기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나 175~63년의 유럽과 북미(北美),

인도의 플라시 전투의 총칭인 7년 전쟁에서 영국은 독일(프러시아 또는 프로이센)

과 연합하여 프랑스, 스페인,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의 연합군을

도처에서 격파하였다. 1898년의 이집트의 파쇼다에서도 프랑스는 영국에게

굴복하였다. 따라서 프랑스는 인도와 북미라는 핵심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세력 균형 정책의 좋은 예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1803~1815)년에 영국이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견제, 격파한 것이고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오스트리아의 보오전쟁(1866), 프랑스와의 보불전쟁(1870

~1871)에서 독일이 승리하자 그 이후 프랑스를 편들어 독일을 견제하였다.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트래팔가 해전(1805)에서 패하자 다음 해에 유럽 대륙 국가

가 영국과 통상하는 것을 막는 대륙봉쇄령을 발표했는데 러시아가 이를 어기자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떠났다- 결국 추위로 실패했지만.

이때 잠시나마 영국이 러시아를 인정해주었고 러시아가 유럽 대륙의 중심국가인

양 프랑스에 반대하는 소위 신성동맹(神聖同盟)의 중심국가처럼 ‘껍쭉’대기도

했으나 튀르키예를 상대로 흑해를 통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1853~1856년의

크리미아 전쟁에서 영국, 프랑스에 막혔다.

 

다시 삼국간섭으로 돌아가면 이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이었는데

독일의 빌헬름 2세와 프랑스의 대통령 펠릭스 포르가 동조한 까닭이었다.

가장 큰 명목상의 이유는 황화론(黃禍論)으로 황인종의 강국이 출현을 막자는

것으로 백인우월주의(白人優越主義)이고 독일은 그 댓가로 중국의 산동(山東)

지방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의 독일을 견제할 목적

으로 러시아와 동맹 관계이기도 하고 독일과의 긴장 관계를 완화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핵심 식민지인 인도의 방어를 위하여 이란과 심지어

조선에서도-1887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구실로 잠시 거문도를 점령했다-

러시아를 압박하였다. 또한 1935년 나치 독일을 견제할 목적으로 열린 스트레사

(이탈리아의 도시) 회의에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참석하고 소련의 초청하지

않아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분노를 샀다.

 

영국은 또한 황인종인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1904)에서도 일본을 편들었다. 이미

영국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었기도 하였다. 관심은 영국의 태도인데 물론 이

동맹은 1923년 완전히 폐기되기는 하였다.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의 영웅 칭호를 받는 맥아더는 미국의 언론이 유럽 전선

의 아이젠하워만을 크게 보도한다고 불평하면서 유럽에서는 ‘문명국가’ 간의 전쟁

이지만 아시아에서의 일본과의 싸움은 ‘야만인’과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태도나 태평양 전쟁에 대한 태도에 있어 미국과 영국의 우월의식

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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