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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반남 선조 5세 文正公 朴尙衷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3-03-21 21:41 조회1,053회 댓글6건

본문

오직 위민(爲民)과 애민(愛民)

누구나 아는 대로 반남 5세 박상충께서는 자랑스런 선조이시다. 관직은 예조

정랑을 거쳐 정3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다. 존칭을 빼고 선조님

의 자랑스러운 사실적인 관점에서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박상충(朴尙衷, 1332년 ~ 1375년)은 고려말(高麗末)의 문신(文臣)이자 학자

(學者)이다. 자(字)는 성부(誠夫)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성격이

강직하여 탐욕으로 재물을 모은 자를 멸시하였으며 학문과 직책에만 전념

하고 당시의 유학자 선비답게 가정에는 무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목은

이색이 5살 위인 처남으로 반남 6세 평도공 은(訔)께서는 부친 사후 외숙부

밑에서 컸다고 한다.

 

다음은 진단학회(震檀學會)의 이병도(李丙燾) 저(著) 한국사 중세편 676페이지에

있는 기록이다.

 

박상충,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등의 儒學派들은 당시의 실권자 이인임의 친원

(親元) 정책에 극구 반대하여 “明나라를 버리고 원나라와 화친하는 것은 强(강)

을 배반하고 弱(약)에 향하며, 順을 버리고 逆을 좇는 것이니 그야말로 국가를

不測 (불측-예측 불가)의 화(禍)에 빠뜨리는 非計(비계-엉터리 계책)라고 하였다.

유학은 중국의 종교에 가까운 학문이요 원나라 몽골족의 종교는 티벳트 불교와

비슷한 라마 불교이다. 여기서 우리나라가 유학을 택하게 된 동기도 강성한 명

나라를 의식한 점이 그 하나의 이유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때는 대륙의 원명 교체기로서 몽골의 원나라는 쇠망의 길로 떨어지고 韓族

의 신흥 명나라는 국운이 한창 일어날 때이다. 누구를 지지하는 것이 순리

인가? 1259년부터 1256년까지 97년간 고려를 수탈해온 원나라인가 신흥

명나라인가? 참고로 원나라의 중국 지배도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

간이다.

물론 명도 수탈자이거나 수탈자가 될 가능성이 크겠지만 일단은 명나라를

지지할 것이다. 國益을 위해서. 당장 명은 고려를 수탈하지 않아도 될 만큼

힘을 가졌고 이에 대항하기 급급한 원은 계속 고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될

것이므로 고려 백성의 삶이 그만큼 곤궁해질 것이다.

 

고려사 권(卷) 142 박상충의 상소의 한 구절을 보자

당시 공민왕이 시해를 당하고 우왕이 들어서서 하루아침에 외교 정책이

바뀌었다. 공민왕은 현명하게 친명정책을 썼으나 어린 우왕(10세)을 옹립한

당시의 실권자 이인임이 친원 정책으로 돌아선 것이다. 또한 당시에 김의라는

자가 고려에 왔다 돌아가는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여 외교적으로 긴장이 극에

달했던 때이기도 했다.

 

”종묘사직과 백성들의 안위가 이 일 하나에 달려 있으니 한번 이 기회를

잃으면 뒤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즉 친원 정책의 결과 맞이하게 될 비참한 결과를 말한 것이다. 명나라가 압도

적인 힘으로 겨우 ‘끼니 때우기’에 급급한 원나라를 몰아낼 것이 분명한데 명

을 자극하면 나중에 엄청난 반대 급부가 돌아올 것이고 그것은 백성들의 피폐한

삶이 될 것이 아닌가?

 

약소국이란 예나 제나 그 운신이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현명 또는 영리

하게 처신한다면 최선은 아니나 차선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때때로 유학은 탁상공론(卓上空論)이나 일삼는 공허(空虛)의 대명사도 되지만

현실적으론 백성을 위한 선택의 측면도 있음을 어찌 부인만 할 수 있겠는가?

댓글목록

宗緖(倉守公后)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宗緖(倉守公后)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타가 났군요.
평도공 휘 訔께서는 반남박씨 6세손입니다.
1370년에 태어나 1374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1375년에 아버지를 여의어 6살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외삼촌인 목은의 집에서 성장하며, 목은에게 학문을 배웠을 것입니다.

문정공께서는 죽부인전을 저술한 가정 이곡의 따님과 혼인하였으므로,
목은 이색은 문정공의 처남이 되지만, 학문적으로는 스승이기도 하며,
1353년 문과에서 목은이 장원하고, 문정공은 2등을 하였습니다.

더브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오타는 수정하였습니다. 글을 쓴 목적은 문정공께서
친명 정책을 택한  바탕은 애민과 위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학이 탁상공론만은
아님을 말하고자 하였지 가족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님을 양해 바랍니다.

宗緖(倉守公后)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宗緖(倉守公后)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명정책과 애민/위민이 어떤관계 인지 모르겠습니다.
뭔나라가 쇠하고, 명나라가 흥하니, 정주의 유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들은 송나라와 같은 漢族이 세운 명나라를 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은 애민/위민 인가요?
왕권 강화와 지도계층인 양반들이 일반백성들을 통솔하기 위한 수단 및 학문적 기초로 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 합니대.

더브러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더브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조선조의 숭유억불은 저의 글이 다루는 바가 아닙니다.
친원정책에 비해서 친명정책이 의미하는 바가 그 동안의 원과 고려의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위민과 애민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사견입니다만 고려조를 멸망시켰으므로
신왕조는 구 왕조와는 다른 어떤 상징이 필요했을 것이고 만약 고려조가 유교를 중시
했다면 새 왕조는 불교를 장려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만 고려말
의 정황으로 보아 친명이 친원에 비해서 백성들의 삶을 생각한 보다 현실적이고 지정학
적인 선택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숭유억불에 대해서는 어떤 왕조나 정치지도집단의 선택
이지 그 자체가 애민 위민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숭불억유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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