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220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419

자유게시판

귀중한 발견

페이지 정보

승모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9 10:16 조회2,261회 댓글0건

본문

 

참으로 귀중한 발견이십니다. 綏자는 유(깃발 늘어질 유)와 수(편안할 수)의 두 가지 독음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쪽으로 읽어야 할지를 깊이 살피지 못하고 지금까지 "수"로 잘못 읽어 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실제로 조사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수"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저 자신도 별 의심 없이 그렇게 받아들였지요). 일반 백성들도 타인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것은 예의에 크게 어긋나거늘, 하물며 이 나라의 왕비이셨던 분의 존호를 잘못 호칭하여 왔다는 것은 우리 민족 전체의 허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그 분을 탄생시킨 반남가문에서조차 잘못 발음하여 왔다는 것은 큰 수치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이제라도 올바른 발음을 찾게되어 참으로 다행이라 사료되며 이것을 발견 지적해주신 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일깨워주셔서 다시 한번더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역사연구가 이덕일씨가 쓴 논문 속에 "유"로 읽고 있는 (흔하지 않은) 사례가 있기에 참고가 될 듯하여 소개합니다.

(전략)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를 이전한 것은 재위 13년째의 일이다. 부친 묘소를 화성에 이전한 직후 정조는 유빈 박씨(綏嬪朴氏)에게서 고대하던 원자를 얻었다. 정조는 아마도 이를 광중에 물이 차 있던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의 묘소를 천하의 길지(吉地)로 이장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화성 신도시는 정조 재위 28년째가 될 갑자년(1804)에 일단 완성되는 것이었다. 갑자년은 세자가 15세 성년이 되는 해이자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칠순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이때 정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화성으로 이거하려고 계획했다. 쉰셋의 한창 나이인 갑자년에 양위하려는 이유는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 말라는 영조의 유언 때문에 자신이 직접 사도세자를 임금으로 추숭할 수 없기에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 이를 추진시키려 한 것이다. (후략)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