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 | Re..뭐라고 하셨길래...찾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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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서] ㉓박세당 '서계집' (2019-01-09 07:13)
고전의 향연 - 옛 선비들의 블로그 ㉓박세당 '서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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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문과 이경석비문
그해 11월 인조가 장유ㆍ이경전ㆍ조희일ㆍ이경석에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짓게 하였는데, 청 나라 범문정 등이 이경석의 글을 택하였다.
몇차례 퇴짜를 맞고 이렇게 수정하라 저렇게 수정하라 해서 나온 비문 글로 1639년 세웠다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장유(1587(선조 20)∼1638(인조 16)), 이경석 (1595~1671 ), 송시열(1607~1689) 셋이 잘어어울리다가, 송시열이
"야 이경석. 니가 쓴 삼전도비문 말인데..나 같으면 안쓴다 안써."
이래 버린거라예.
前判書朴世堂所撰故相臣李景奭碑文中。誣謂臣先祖父臣植於三田立碑時。與新豐府院君張維。先承命撰文。不滿彼意。上面命景奭改撰。又謂於庚辰冬。景奭與臣祖議撰國書
같이 삼전도비문을 썼는데 ...
그런데 넷이 써냈는데 ...
거기서 탈락한 장유는,
[다음해 2월, 삼전도비문을 지었는데 지나치게 굴욕적이라 하여 이경석의 것을 고쳐서 쓰다.] > 같이 썼는데 장유가 쓴 글이 너무 굴욕적이라 이경석 글을 채택했다고 하네요.
물론 이 글도 청나라 한테 퇴짜를 맞고 몇 차례 수정해서 비문을 썼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송시열이 이경석한테 뭐 그따위 비문을 썼느냐고 한 것이지요.
장유는 3월, 포로로 잡혀갔던 며느리의 이혼 허락을 예조에 청하였다.
며느리를 포로로...그렇다구 이혼...
며느리는 ?...이런 일도 있었군요.
장유의 딸은 효종의 비 인선왕후이구요.
장유가 죽고 이경석이 시호를 청하는 글을 썼구요. 송시열은 신도비명을 썼네요.
이경석이 "난들 쓰고 싶어 쓴거 아니거든. 그럼 같이 삼전도비문을 쓴 장유의 신도비명은 니가 왜 쓰는데?"
송시열이 신도비문을 쓴 네사람 모두 나가 죽어라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경석 한 사람만 잡고 늘어지니...
이경석이 죽고 세당은 그 후손이 비문을 써달라기에 평소 소신도 있고 해서 썼는데,
"야 장유의 글보다 이경석이 쓴게 낫다고 임금이 바꿨는데 뭘 그러냐?" 한 것이지요.
이경석은 호가 계곡이고 세당은 서계(서쪽계곡)이네요. 뭔가...
그래서 이경석 비문 중에 송시열을 공격한 문구가 들어있다 하여 사변록 문제와 함께 반대파(노론측)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답니다.
홍계적(洪啓迪, 1680~1722) 남양(南陽) 1702년(숙종28) 태학생의 신분으로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과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태워 없애도록 상소하였다. 남양....
사변록
서계의 저술 중에는 당시에 이단시하던 것으로 노자의 《도덕경주(道德經註)》와 장자의 《남화경주(南華經註)》가 있고, 또 농서(農書)의 일종인 《색경(穡經)》도 있지만 가장 물의를 일으키던 것이 《사변록》이었다.
이리저리 욕을 해대니 숙종도《사변록》과 비문을 보고 노하여, 서계의 관직을 삭탈하고 유배를 명하였다가, 그의 연로와 질병과 또 그 아들 태보의 순절(殉節) 등을 고려하여 특히 유배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하여 그는 병졸하고 말았다. 고 어딘가 쓰여 있길래 퍼왔습니다.
서계(西溪)는 퍽 대담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주자의 사서주해(四書註解)를 보고 대학 중용 예기가 완벽한 책이 아니라고 한거지요.
사실 잘못된 부분이나 앞뒤로 바뀌어야 할 것도 있고 빠진 글도 있고 그래서 그 예전 사람들도 고쳐읽고 쓰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사변록..'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쓴 글이니 내맘대로 쓴 글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궤변록으로 보인거지요.
사서삼경을 주자가 해석해 놨는데, 서계선생이 그렇지만 '나는 요렇게 생각한다' 하니 열이 받은거지요.
요즘말로 획일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니 자유로운 사상을 이단이라고 하는거지요.
자의 반열에 오르셨으니 세당이 아니라 세자가 되어야지요.
공자 맹자 주자 노자 장자...그리고 세자
당시 사람들이 "공자 맹자 주자를 깔 정도면 세당이 아니고 세자로 불러야 하지않겠어요?"
그래서 더욱 이름있는 분이 되신거지요.
더욱 존경합니다.
선조의 뜻을 이어 자유로운 생각을 받아들여야겠지요.
고집불통☞만사형통
댓글목록
4kraphs8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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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뜻을 이어 자유로운 생각을 받아들여야겠지요.>
아주 멋진 말씀입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세자>(世子?)가 아니라
<박자(朴子)>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아 참,
우암 송시열의 문집 제목을 <宋子大全(송자대전)>이라고 했지요.
<朱子大全(주자대전)>을 모방해서 말이죠.
그럼
우리도 이참에 서계 할아버님 문집 제목을 아예
<朴子大全(박자대전)>으로 바꿔 버릴까요?
박대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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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몰랐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박창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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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각과 다르면 궤변이고 이단일까요?
그래서 얼마 전에 올려졌던 글들이 아무런 해명도 없이 삭제된 것일까요?
글 한자 말 한마디가 엄격해야했던 조선시대에도 당당했던 선조님들은 실학사상을 가지고 사셨는데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로 사는 우리의 생각이 한심한 것이 현실인데?
<고집불통☞만사형통> 변화가 가능할까요?
이글을 펌 합니다. 양해바랍니다.
좋은 글들을 올려주시는 대서종인님 감사합니다.
박대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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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보면 제가 글을 올렸다가 삭제한 줄 아시겠네요. 저 아닙니다.
박창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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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박대서 님 ,
예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분명 대서 종인의 글은 아닙니다.
다른 종인 두 분의 글이 동시에 삭제된 것을 염두에 두고 쓴 내용입니다.
대서 종인의 글은 삭제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구노력이 돋보이는 객관적 글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