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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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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2-05 13:38 조회2,9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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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민경락님이 쓴 글입니다.



민경락 author_icon.gif우서 님의 블로그 더보기
입력 : 2014.12.05 09:24

 

남한산성1.jpg

*남한산성. 

 

명.jpg

*청나라 심양궁

 

인조는 왜 소현세자를 죽게 했을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실에는 비운의 죽음도 많았고 지존을 따르는 권력자들 또한 비참한 최후로 생을 마감하였는 자들이 수 없이 많다.

왕위를 둘러싸고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아들, 형제가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끝내 어느한쪽이 비명에 죽는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

어머니를 죽인 로마황제 네로, 형제와 조카를 죽이고 오른 당 태종 이세민, 아들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 측천무후,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슬프게 하면서 오른 조선의 태종, 아들을 뒤주에 넣어 죽게한 영조 등 최고 권력 앞에는 부모 형제도 인연도 소용없다.

아니 큰일을 할려면 그런 것도 내 동댕이 칠 줄 알아야 그런 일을 할수 있을까?

 

그러나 조선시대에 인조가 장자 소현세자를 죽인 것은 별로 아는 사람이 없다 이 또한 인조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인지 그 당시 친명 배청의 세도가들로 인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세력에 밀려서일까 아니면 너무 시대의 흐름을 잘 알고 친 청()적인 아들로 인해 자기 보위가 위태로워서 였을까 인조는 소현세자를 귀국하자마자 제거하였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맏아들로 태어나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광해군은 중립적인 태도 오히려 친금 적이다가 친명파 서인들에게 밀려나고 인조는 친명 배금의 시대흐름에 왕이 되었다. 1627년 즉위한지 5년 만에 후금은 조선을 공격해서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강화도로 피신하여 형제의 나라가 될것을 약속하였고, 그후 후금은 나라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 인조 14년에 다시 재 침략을 받아서 강화도로 피난 갈려니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난간다. 그때 청이 제시한 조건은 12가지였고 그 중에 세자와 왕자 대신들의 아들을 인질로 데려간다는 조항에 따라 소현세자가 인질로 아우들과 함께 잡혀갔다.

 

1637 1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송파 삼전나루에 나가서 세 번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했다. 그리하여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180여명의 고위직 아들들이 끌려갔다.

그때 세자의 나이25세였다. 두 달이 걸려서 청의 수도 심양에 도착하였다. 그 치욕과 엄동설한에 그 먼길을 가는 고생을 고려해보면 눈물이 난다.

세월이 흘러 3년이 지나고 인조는 병이 났다. 세자가 잠시 병문안으로 귀국하였는데 세자가 엎드려 우니 인조는 세자를 어루만지며 다시 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하며 울었다.

신하들 그리고 따라온 사신도 울었다.

 

그러나 더 머물러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요청도 거절당하고 한 달후 다시 세자는 갔다.

그 후 청은 세자를 후대하였다. 청 황제는 중신들이 모이는 조회에도 참석시키고 요직의 인물들과 사귀게 하고 밖앝 출입도 쉽게 하게하고 명과의 결전을 두고 있는 청은 조선과의 관계를 안정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선인들이 있는 심관을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기관으로 여겼다.

조선에 통보사항은 그리로 하고 조선에 침략대장 용골대는 심관 담당으로 명나라 징벌에 군비를 내라 도망간 포로들을 잡아 보내라 등 갖가지요구를 심관을 통해서 조선으로 전해졌다.

한편 조선에서는 세자가 심양에서 친명 배청의 절의를 지켜 그리 행동하도록 바랐다.

그런데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는 세자가 미웠다.

오히려 간혹 연락되는 정보가 그들과 친하게 잘 지난다는 것이 인조는 거슬렸다.

심관은 처음에는 청이 먹고 쓰고 유지하는 경비도 지원했으나 나중에는 토지를 주어 경작해서 모든 것 충당 하도록 해서 약 300여명의 경비를 충당하고 때로는 청의 고관에게 뇌물도 주어야 하는 등으로 심관은 자연히 본국에 경비 요청도 하게 되고 청의 요구 등으로 불편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조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관도 세자도 미워지고 있었다.

 

그 후 청은 1644 5월초 명을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긴다.

그때 청에는 외국인들 그리고 신 문물들이 들어오고 그들로 인해 개화되고 있었고 세자는 천주교 독일 신부 아담샬, 과학자들과도 친하고, 북경의 천문대도 보고 귀국하면 우리도 서양의 문물, 과학문명 종교 등 이들의 도움을 받아 큰 변화를 있게 할 것이다고 마음먹고 그는 그들과의 교우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러던 중 청의 황제는 북경을 얻기 전에는 양국이 서로 의심 하였으나 이제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봉림대군은 머물러서 인평대군과 교대로 왕래하시오 고 하였다.

 

이때가 인조 22 1644년11월 11이다 세자는 청에서 서양인 친구에게 받은 선물과 필요한 많은 진귀한 문물들을 가지고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라 이듬해 1 18일 세자일행은 서울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기류는 세자에게 냉담했다.

인조는 축하인사도 금하고 일설에 의하면 청나라사정을 알리고 그곳에서 가져온 책과 기구 등을 보이자 벼루로 세자의 얼굴을 내리쳤다고 하고 그로 인해 병이 났는데 4 24일 어의 이형익에게 침을 맞게 했는데 3일만에 세자는 죽었다.

그때 나이 34살 온갖 고생을 하고 오직 나라의 부흥을 위해 참고 애쓰고 왔는 그의 일생은 끝났다.

 

그후 신하들이 의관 이형익을 문책하여야 한다고 상소가 빗발치니 인조는 오히려 의관을 두둔하고 세자의 장례는 서둘러 입관하고 염습 할 때는 족친 4,5인만 참여하에 다른 관리들은 못 보게 하였고 의관은 아무런 벌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벌해야 한다는 송준기라는 사람을 체직 시켰다고 한다.

그 후 인조의 장손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었는데 당연히 그를 세손으로 정해야 하나 신하들의 상소도 묵살하고 사양하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정하고 그가 나중에 효종이 되었다.

 

소현세자는 억울하게 죽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세자빈도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세자빈 강씨의 칠순 노모도 죽인다 그리고 세자의 석철 석린 석견 세 아들도 제주도에 귀양 보냈고 그 이듬해 또 그들도 죽었다 인조는 손자가 죽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세자일가를 모두 죽인 뒤에는 이형익이 그리고 당시 세력가 김자점이 있었고 그 뒤에는 인조가 있었다는 의혹의 글들이 있다

인조는 왜 그랬을까 아마 청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소현세자는 반청을 앞세운 당시 정권이 용납하지 못할 것이고 설사 왕이 되더라도 제대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청이 득세를 하였으니 친 청이 된 소현세자로 인해 자기의 왕좌가 염려되어 였는지 알길은 없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시커멓게 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많이 안타깝다.

 

*긴 글 읽어주시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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