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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록 충재 권벌 가문소장 문정공 휘상충 전수 정조대왕 서 "보물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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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10-01 08:45 조회3,8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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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수진근사록(袖珍近思錄)에 대한 서() 갑인년

우리나라 문물이 크게 발달했을 때를 말한다면 사실 우리 중묘(中廟) 한창 때가 그 시작이라고 할 것이다. 그때는 나라 전체가 복을 누리고 가는 곳마다 봄이어서 치화(治化)와 문운(文運)이 서로 걸맞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성조(聖祖)께서는 별로 하시는 일 없이 자주 유학(儒學)하는 신하들과 어울려 천인(天人) 성명(性命)의 깊은 이치나 강론하며 즐기셨다. 지금도 그때 일을 말하는 자들은, 그때의 기상이야말로 흡사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쏘이던 증점(曾點)의 기상이나 주염계(周濂溪)이정(二程)의 도학(道學)의 절정을 이룬 기상 같았다고들 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고()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옷소매 속 근사록(近思錄)사건도 그 당시 있었던 매우 흥미진진한 볼거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때 경회루(慶會樓)에서 꽃잔치를 하면서 임금과 신하가 자리를 함께하고 서로 취토록 술을 권하고 시를 화답하며 즐겼는데, 그 자리에서 피차 무릎을 맞대고 진지하게 나눈 얘기들은 모두가 도체(道體)의 근원에 관한 것, 또 존양(存養)의 공부, 제가 치국의 방법, 또는 도통(道統)과 이단(異端)을 구별하는 것 등등이었던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다 물러가고 액정(掖庭) 사람들이 자리를 치우다가 옷소매에 넣고 다니던 근사록원본을 주워 성조께 올렸더니, 성조께서 하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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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틀림없이 권벌의 옷소매 속 물건이다. 그에게 돌려주라.”

하시기에, 권벌에게 물었더니 과연 그렇더라는 것이다. 지금 그 책을 보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라고 할 만한 낙관도 없고 다른 아무런 기록이 없는데도 즉석에서 권벌을 말하며 그에게 돌려주라고 한 것은 권벌이 낮이나 밤이나 주상을 대하여 고문(顧問)에 응하고 계옥(啓沃)을 했던 그 깊고도 정밀한 의취들이 모두 그 책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주상은 그래서 그 신하를 알게 되고, 그 신하는 그래서 주상께 발탁되어 서로 모르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심기가 상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자랑거리였고 후세에까지 전해졌으며 선조(先祖)에 와서는 특별히 별본(別本)을 하사하시고 그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내가 갑인년에 영남가는 사신을 통해 그 옷소매에 넣고 다니던 원본과 그 사실을 기록하여 특별히 하사한 별본을 다 가져오게 하여 읽고 또 읽고 만지고 또 만지며 무한한 감회를 느꼈던 것이다. 밭 갈고 김매면서도 책을 품고 다니고, 길 가면서도 책을 들고 가고, 잔치 자리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발자국 한 번 옮기는 순간에도 배움을 잊지 않았던 그러한 이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다 자기 명분에 맞는 실효를 거두기 위해 어느 정도 쌓아 온 노력을 나타낸 것뿐이었지, 태액지(太液地)에서 잔치가 막 끝나고 나뭇잎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을 때 책만 보고도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 정도로 주상의 총애를 받은 권벌 같은 사람이야 언제 있었던가. () 나라 유생들의 삼십중석(三十重席)과 당() 나라 신하의 칠보장산(七寶糚山)에 대해 역사가들은 그것을 일러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기투합한 천고의 자랑거리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들은 다 보기 좋은 하나의 사치스러움에 불과한 것들이어서 이 일과는 비교가 안 된다.

 

감탄스럽게도 치화(治化)가 높고 문운(文運)이 크게 열려 긴 세월을 두고 물려받아 온 교훈으로 하여 아직까지도 그 아름다운 상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한 가지 일만 보아도 그 밖의 다른 일들은 미루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그 수진본(袖珍本)의 서문으로 이 말을 쓰고, 이어 심경(心經)한 질을 반사하여 돌아가서 그 수진본과 함께 잘 갈무리하여 끝없이 전해지도록 하라고 하였다. - 선정(先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도 자기가 손수 정정한 수진본 심경이 있었는데, 책 모양이 아주 예스럽고 아담했으며 글자 획도 또렷했다. 내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 당시 요속(僚屬)으로 있었던 선정의 후손을 통하여 그 책을 본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충정공의 집에 소장된 근사록(近思錄)구본(舊本)을 보고 책머리에다 서문까지 썼다. 이 책을 돌려보내면서 심경을 반사한 뜻은 이 두 책이 의례(義例)가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고 또 두 사람의 사적도 서로 비슷한 면이 있어 영남 선비들로 하여금 이를 영구히 모범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 때는 내가 즉위한 지 십팔년째 되는 갑인년 중추절(仲秋節)이다.

 

정조대왕은 세종대왕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알고 있고 외가에 다닐 때 이 책을 보고 먼 조상의 정취를 느끼며 감동한 추억이 새롭습니다.

 

인천에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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