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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도공이 사시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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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5-16 11:30 조회3,797회 댓글0건

본문

위의 그림은  겸재 정선의  동소문도

 

이규태 코너 풍류마당사적고(事蹟考) 중에서

 

풍류의 마당으로 개방된 겨우 1km의 동숭동거리는 지금 흔적을 찾아 볼수없는 사적이 촘촘 하게 밀집된 역사의 거리이기도 하다 굵직한것부터 가려보자.

 

서울대 의과대학의 남쪽 경계즈음이 태종의 외손자요, 간신 유자광의 모함으로 젊어서 죽은 남이 장군이태어나 자라던 집터이다. 이집터에는 장군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남이탑이 서 있었다던데, 이미 복원돼야 했을 사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다. 남이탑의 바로 그 이웃에는 세조때 정승이며 풍류로 우상처럼받았던 이석형(李石亨)의 초가집 계일정(戒溢亭)이 있었다.

문헌에 보면 연못을 파 물이 넘치지도 또 마르지도 않게 자연조절하여 그의 자손이나 찾아 오는 손님에게 매사를 분에 넘치지 않게 하라는 훈계를 이 계일(戒溢)로 했다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연못의 연꽃이 너무 아름다워 연지동이라는 동네 이름까지 남아 있게된 것이다. 그 초정(草亭)과 연못이 복원된다면 얼마나 좋은까 하는 생각이다.

그 연못 맞바래기에 북벌 계획을 세웠던 용기있던 반사대주의자 효종과 그의 아우 인평대군이 태어나 자라던 조양루(朝陽樓)가 우애를 상징하며 맞바라보고 있었다. 성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락으로 소문난 옛시에 자주 오르고 있는 다락들이다.

태종때 청빈하기로 소문난 박은(朴訔)의 집도 바로 그 길가에 있었다.

높은 정승이면서 못사는 사람에게 녹을 나누어주고 가난한 초가에서 조밥을 먹고 사는 것을 직접 숨어보던 태종을 놀라게 했다는 바로 청빈의 집인것이다. (下略)

 

 

 

 

[ 낙산 백림정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과 동숭동 일대를 조선시대에는 상백동(上柏洞)이라 하였다. 즉 혜화동천주교회와 동성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백동(잣나무골), 백자동(柏子洞)이라 불렀고, 위 천주교회를 처음에는 백동교회라 하였다

이 지명은 태종 때 박은 이 낙산 아래 이곳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이라는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로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東小門圖>에 보면 낙산 서북기슭의 산아래 마을에 큰 기와집들이 즐비하고, 소나무 숲이 우거진 풍광을 잘 묘사해 놓고 있다. (홈페이지에서)

 

 

 

 

[천자칼럼] 낙산 복원

서울은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 좌청룡인 낙산이 동쪽으로,우백호인 인왕산이 서쪽으로 뻗어 있고 남쪽에는 남산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설명한다.

이처럼 낙산은 인왕산과 대치되는 한양도성의 내사산중 동산으로,옛날에는 중시되던 산이다.

옛 기록들을 보면 산이 낮아(해발 125m) 골짜기가 깊지는 않지만 기암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맑고 골짜기마다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등 상록수가 빽빽이 들어서 풍광이 수려하고 그윽했다.

그래서 조선초부터 왕족이나 문인들이 계곡근처에 정자를 지어 정원을 꾸미고살았다.

태종때의 좌의정 박은은 지금의 동숭동에 백림정을 짓고 청한한 생활을 했다.

중종때 시인 신광한도 이곳에 살아 "신댓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화동에는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석양루와 이화정을 비롯 영조때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이 있어 왕족 문인들이 즐겨 찾았다.

산록에 있던 쌍계동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수림,맑은 물이 절경을 이루어 삼청인왕 백운 청학동과 함께 도성내 5대 명승으로 꼽혔다.

또 동촌이씨의 세거지이기도 해서 조선후기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썼다는 비우당도 낙산에 있었다.

세종때 정승 유관이 살던 터에 지은 집이다.

어린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정순왕후와 눈물의 이별을 한 청룡사는 지금도 낙산자락에 있다.

효종때 어영대장 이완, 헤이그밀사 이상설도 낙산아래 살면서 계곡에서 청유했다.

낙산밑에 경성제국대학이 들어선 것은 1924년이다.

선비들 대신 학생들이 낙산계곡을 산책했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옛 낙산의 풍경들이다.

일제는 1940년 낙산일대 16만여평을 공원부지로 지정해 놓았다.

그뒤 서울시는 41동의 시민아파트를 산정상에까지 지었다.

서울시가 엊그제 낙산복원작업을 시작했다.

낙산의 옛모습 복원은 불가능하겠지만 6만여평의 공원이 생긴다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도 없다.

 

 

 

 

 

 

동숭동은 191441일 경성부의 동명제정 때 숭교방 동쪽에 있는 동이라 하여 동숭동이 동명이 유래되었다.

 

쌍계동은 동숭동과 이화동에 걸쳐 있었던 마을로 쌍시내의 수석이 매우 아름답고, 뒤에는 바위가 기묘하면서도 수목이 울창하고 꽃나무가 많이 있어서 경치 좋기로 이름이 났다. 서울에서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은 첫째 삼청동, 둘째 인왕동, 셋째 쌍계동, 넷째 백운동, 다섯째 청학동을 꼽았다.

 

우잣골 또는 상백동은 동숭동과 혜화동에 걸쳐있는데 태종 때 박은(朴訔0)이 낙산(駱山)아래에 살면서 잣나무를 심고 백림정(栢林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종로구 동숭동 유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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