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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승혁 대부님께 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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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승혁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4-03-10 12:26 조회3,0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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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혁 대부님께 답합니다.

대부님의 글을 읽고서 글이란 단 한 줄을 써도 정성을 다해야하고, 더구나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한 글이라면 심혈을 기울려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先祖와 관계된 글은 衷心이 깃들지 않으면 崇祖가 아니므로 삼가하고 삼가 해야 할 뿐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천작한 글재주로 얕은 생각을 적었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족했던 몇 가지를 다시 정리하여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논의(論議)의 초점을 흐리지 않기 위해서 번거로운 인사말은 가급적 생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논의의 주제는 <平度公께서는 本籍潘南에서 羅州로 왜 바꾸셨나?>입니다. 이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는 생략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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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任內, 潘南縣이 혁파되어 羅州歸屬되자, (任內,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가 없이, 지방의 조세만 거두어 중앙으로 보내고, 그 외의 행정은 호장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던 을 말함) 平度公께서 本籍潘南에서 羅州로 옮겨 달라는 이 있었다고 하는, 王朝實錄 太宗朝記事는 더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때 이래로 나주를 본관으로 하여 내려오다가, 선조가 다른 나주 박씨와 혼동됨으로 癸亥譜를 만든 肅宗때에 다시 潘南으로 貫鄕還元시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는 常識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만 "상식"이라는 말씀은 좀 과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종인들은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 문제는 본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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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의문을 가졌던 것은
平度公께서는 本籍潘南에서 羅州로 왜 바꾸셨나? 입니다. 여러분의 말씀은 반남현이 혁파되어 나주로 합쳐지게 됨으로라는 설명인데, 나는 이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이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기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의문을 가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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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현이 혁파되어 나주에게 병합된 것은 행정적인 일에 불과할 뿐
, 반남 이라는 本鄕地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는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행정관청인 현청이 없어졌다고 하여, 본적을 바꾸었다는 다른 성씨를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신다니 어쩔 수 없습니다만, 관련분야 전공학자들(이수건, 정승모 등)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 초기 행정제도 개편으로 인해 본적을 바꾼 성관(姓貫)들이 매우 많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나주목의 임내가 혁파됨으로써 임내 본관을 가진 朴氏들이 본관을 바꾸어 대부분 <羅州>를 함께 본관으로 하게 됩니다. 이 사실은 뒤에서 다시 거론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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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縣廳이 혁파되어 없어져 潘南이라는 고장이 으로 격하되기는 했으나, 留鄕所라는 명칭의 자치기구가 있어, 戶長別監이 있고, 또한 에는 자체적으로 선출한 面長이라고 할 수 있는 座首風憲이라는 鄕吏가 있었습니다.

중앙에서 牧師가 파견되어 온다고 하여도, 그 지방의 자치기구의 도움이 없이는 정치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을 평도공 자신이 너무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에 대하여 길게 쓴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기에 더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평도공께서는 왜 본적을 옮기셨는지가 중요함으로 그에 대한 논의의 참고자료로 몇 마디를 하였던 것입니다.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기는 합니다만 본 논의의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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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 자연이 先考이신 문정공의 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두 번째는 에 관한 문제입니다.

潘南先生께서 文正이라는 諡號를 받으신 것은, 알다시피 肅宗 7년인 辛酉年입니다. 그로부터 2癸亥譜가 나왔으나, 癸亥譜의 기록에도, 潘南이었고, 그 기록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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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潘南이라는 가 문정공께서 스스로 지으신 自號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自號"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자호/비자호 문제를 떠나서 중요한 것은, 문정공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 "반남(선생)"이라는 호칭이 실제로 사용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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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발간된
壬午譜에는 庚申譜에서는 보이지 않던 문정공의 기록이 몇 편이 더 실렸는데, 그중에 定齋公하신 潘南先生家傳潘南先生 事蹟略이 새로 실려서, 문정공의 자료가 더욱 풍성해진 것 같습니다.

우선 文正公 遺事에 보면 諸公중에는, 文正公 이외에도 姓氏앞에 가 아닌 貫鄕을 붙인 몇 사람이 보입니다.

權近이 지은 李穡行狀에 나타나는 永嘉 金九容, 烏川 鄭夢周, 潘陽 朴尙衷, 密陽 朴宜中, 京山 李崇仁,이 보이고,

鄭道傳이 지은 陶隱集에는 烏川 鄭公達可, 京山 李公子安. 晋陽 河公大臨, 潘陽 朴公誠夫, 永嘉 金公敬之. 密陽 朴公子虛, 永嘉 權公可達, 茂松 尹公紹宗,이 보입니다.

 陽村 權近1352년생으로 1369(공민왕 17)에 대과에 급제한 인물로, 과거에 급제한 햇수는 15년이나 차이가 나지만, 출생년도는 같음으로 을 썼지만, 정도전은 나이로나 과거에 급제한 햇수가 문정공과 諸公과는 차이가 있음으로 감히 을 쓰지 못하고 를 썼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文正公生存하셨을 당시에는, 친교를 가졌던 諸公들에게 모두 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鄭夢周號 圃隱,이나 李崇仁逃隱, 朴宜中定齋,등은 後日에 그들의 관직이 높이 오르고, 文筆을 손에 잡으면서 지은 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위의 자료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본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당시 인물들이 호를 사용하여 서로를 호칭한 정확한 시기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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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우리 문정공께서는
44세의 짧은 을 사셨기 때문에, 생전에는 미처 호를 갖지 못하셨으나, 뛰어나신 성품과 학문이 높아 이룬 업적이 크기에, 절친한 同輩가 아닌 後輩들은 先生이라는 존칭으로 높여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문정공께서 생전에 "반남(선생)"이라는 호칭을 알고(듣고) 계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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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道傳
哭潘南先生에서 先生이라는 呼稱20번이나 쓰면서 마지막에 말하기를 鳴呼,九原如何作兮.惟吾先生之與歸” (오호 황천에 가게 되면, 오직 선생에게 귀의 하리라.)하는 말 중에, 先生에게 歸依한다는 말은 학문과 사상을 쫓겠다는 말이니, 三峰이 얼마나 문정공을 높이 샀는지 알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말을 한 것은 이 글이 꼭 祭文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실 정도전은 1342년생으로 1362년의 科擧에서 同進事及第하여 그 이듬해인 1363년에 外方의 말단직으로 官界에 진출한 인물로, 문정공보다 나이가 10년이 아래일 뿐만 아니라, 科擧에 합격한 년도도 공민왕 11(1362)이니 문정공 보다는 9년이 뒤지는 후배인데, 李穡의 제자로 중건된 성균관의 강론에 참예하게 된 후, 禑王元年에 일어난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 同流가 되었을 뿐이었고, 그의 개혁사상은 새롭게 연 조선왕조에 깊이 뿌리내려서 조선왕조의 뼈대가 되었음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문정공에 관한 여러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朴尙衷輩라는 文句가 보이는데, 라는 글자는 무리, 동류, 동아리, 등을 나타내기에, 禑王 元年에 일어난 정치적인 일련의 사건에는 宰相李仁任과 그 반대파인 新興士大夫들을 대표하는 朴尙衷과 그 同流들이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정도전도 감히 平徘로 넘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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