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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모 윤 황후의 붕어 47주년 추모[브레이크뉴스-2013-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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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9-25 12:47 조회4,0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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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국모 윤 황후의 붕어 47주년 추모

 
박관우 칼럼니스트


필자가 오랜 세월동안 대한제국 황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마지막 국모라 할 수 있는 윤 황후의 행적에 대하여 추적하게 된 것은 2012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구왕궁청 사무장관과 더불어 숙명여대 제 3대 이사장(1946년 6월 ~ 1950년 11월)을 역임하였던 창석 윤홍섭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윤 황후가 창석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특히 창석을 통하여 윤 황후가 황실 내탕금 10만원을 신익희에게 전달하였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며칠전, 인터넷에 “마지막 국모”와 “마지막 황후”라고 검색을 해 본 결과 차마 믿기 어려운 현상을 발견하였는데 당연히 윤 황후로 통일되어야 하거늘 대부분이 명성황후로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명성황후가 윤 황후에 비하여 오랜 세월 재위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종황제의 황후로서 공식적으로 3년간이나 황후자리에 있었던 윤 황후의 위상이 이렇게나 초라한 것에 심적 충격을 받고 이번 기회에 브레이크뉴스 독자들에게 윤 황후의 진면목을 소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윤 황후는 지금으로부터 119년전인 1894년에 서울 옥인동에서 해평부원군 윤택영과 기계유씨 사이에 2남 2녀중 장녀로 태어 났는데, 윤 황후가 출생한 1894년에 바로 동학혁명이 일어 났으니 격동의 시기에 태어 났다고 할 수 있다.
 
13세가 되는 1906년 황태자비로 간택이 되며, 그 이듬해인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인하여 결국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면서 그녀도 황태자비에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인하여 불과 3년만에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한다.
 
바로 이런 부분 때문에 한 나라의 엄연한 황후의 신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마지막 국모로서의 예우를 제대로 받지 못한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비통한 심정 금할 수가 없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윤 황후를 마치 제2의 인현왕후가 환생한 것처럼 국모로서의 품위와 고매한 인품을 가진 분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러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황후에서 일찍 물러난 것이 지금도 아쉽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여기서 윤 황후의 행적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면 경술국치 당시 병풍뒤에서 몰래 어전회의를 듣다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었다는 것인데,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상상해 보건대, 그 어린 나이에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볼 때 윤 황후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라도 옥새를 지키고자 하였던  윤 황후이었거만 안타깝게도 윤덕영에게 강제로 뺏기게 되지만 국권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던 그  굳은 의지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통한의 붕어를 하며 그로부터 7년뒤인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황제도 붕어하게 되면서 윤 황후가 명실상부한 황실의 상징적인 구심점이 된다.
 
윤 황후가 황태자비로 간택되었을 당시 순종황제보다 20년 연하였는데, 안타깝게도 후손을 두지 못하여 인간적인 고뇌가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만약에 윤 황후가 황손을 출산하였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예측하기 어려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순종황제가 붕어한 이후 윤 황후는 본래 처소인 대조전에서 낙선재로  옮기게 된다.
 
그런데 윤 황후의 생애에 있어서 고난의 시기가 다가오니 그것은 바로 동족상쟁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구체적으로 낙선재에서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민군이 들어와서 결국은 5일만에 떠나게 되나 다행스럽게도 고종황제의 형수가 되는 흥친왕비(興親王妃)가 보낸 궁녀의 안내를 받아서 운현궁으로 이어(移御)하게 되며, 1.4후퇴 때 미군부대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게 되니 일제시대에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었거늘 이번에는 같은 민족끼리 전쟁하는 비극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당시 윤 황후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여기서 필자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6.25 전쟁 당시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이승만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가면서 비록 대한제국이 망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국모였으며 당연히 윤 황후도 모셔 갔어야 한다고 보는데, 실제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부산에서 환도한 이후 당연히 낙선재로 환궁하는 것이 합당한 처사이거늘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이 낙선재가 국가의 소유라는 논리를 내세워 정릉 인수재(仁壽齋)로 이어(移御)하게 한 점은 한 나라의 국모였던 분에 대한 정중한 예우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특히 윤 황후는 상해임정수립 준비자금으로 10만원을 지원한 분이었거늘 당시 이 전 대통령의 결정에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윤 황후는 인수재(仁壽齋)에서 7년 동안 인고(認苦)의 세월을 보낸 뒤에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면서 그리도 꿈에 그리던 낙선재에 환궁하게 되며, 그로부터 6년뒤인 1966년 2월 3일 향년 73세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게 된다.
 
끝으로 윤 황후의 붕어 47주년을 애절한 마음으로 추모하면서 확실한 마지막 국모이며 동시에 마지막 황후라는 사실이 우리사회에 널리 전파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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