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즉위와 평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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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임금 세종의 즉위와 평도공>
1418년(태종 18)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은 2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그의 형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세자에 책봉된 지 7일 만이었다. 세종의 부친 태종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상황이라 즉위식을 올리는 세종이나 이를 지켜보는 신료들이나 착잡한 심정을 가누기 힘들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은 14년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세자시절의 방종과 음행으로 아버지 태종의 눈밖에 나 세자에서 쫓겨나고 그 뒤를 세종이 이어받은 것이다.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면서 태종은 양녕의 큰아들[순성군 이개]을 세자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이를 조말생·이명덕 등에게 알렸다. 조말생과 이명덕이 이 소식을 신료들에게 전하자 이들의 의견은 분분해졌다.
당시 한상경 이하 20여 명의 신료들은 태종의 의견이 그렇고 또한 그것이 사리에 맞으니 당연히 양녕의 큰아들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박은·유정현·조말생 등 10여 명의 신료들은 양녕의 큰아들은 아직 어리니 대신 어진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이견을 제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몇몇의 신료들은 점을 쳐서 후계자를 정하자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태종은 신료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부인 민씨의 의견을 물었다. 민비는 양녕의 형제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면 훗날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며 양녕의 큰아들을 세자로 삼기를 원했다.
그런데 민비의 의견을 물은 태종은 양녕의 큰아들을 제쳐두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뒤의 세종]을 세자로 지명했다. 충녕대군은 박은·유정현·조말생 등이 어진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했던 바로 그 당사자였다. 이렇게 세종은 부왕 태종의 결단과 일부 신료들의 추천에 의해 세자로 지명된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한 후 곧바로 양위를 하려 했다. 그 사전 작업으로서 세자교체 5일 후에 세자에게 옥새를 넘겨주었고 7일 후에는 아예 전위절차까지 마쳤다. 태종이 전위한 목적은 무엇일까? 갑자기 권력의 무상을 느껴서일까?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하고자 하는 이유를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 라고 했다. 사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라 갖가지 악역을 담당했던 태종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권력과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만도 하다. 그러나 태종이 세종에게 전위한 실제 목적은 후계구도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했을 때에는 14년간이나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의 지지세력이 여전히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양녕대군을 편애하던 태종의 부인 민비가 문제였다. 만약 태종이 민비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면 그 다음의 정치판은 기가 센 민비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이 뻔했다. 그럴 경우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로 지명된 충녕대군이 어머니 민비를 대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태종이 기껏 구상해 놓은 후계구도가 엉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미리 전위하여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태종은 세종이 즉위한 후 4년을 더 생존했다. 이 기간 동안 세종이 왕이었지만 모든 실권은 태종이 장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권력의 최후 보루라 할 병권을 태종이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세종의 나이 30이 될 때까지 자신이 병권을 맡고 있겠다고 했다. 즉위 당시 세종이 22세였으니 앞으로 적어도 8년간은 더 병권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태종의 부인 민비가 태종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2년 후에는 태종도 사망했다.
부왕 태종이 사망한 후부터 세종은 명실상부한 국왕으로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세종은 부왕이 닦아놓은 후계구도의 안정 속에서 자신의 포부와 경륜을 마음껏 펼쳤다.
출처: 조선왕조사.
1418년(태종 18) 8월 10일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은 22세의 나이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세종이 그의 형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세자에 책봉된 지 7일 만이었다. 세종의 부친 태종이 아직도 생존해 있는 상황이라 즉위식을 올리는 세종이나 이를 지켜보는 신료들이나 착잡한 심정을 가누기 힘들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은 14년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세자시절의 방종과 음행으로 아버지 태종의 눈밖에 나 세자에서 쫓겨나고 그 뒤를 세종이 이어받은 것이다.
양녕을 세자에서 폐하면서 태종은 양녕의 큰아들[순성군 이개]을 세자로 세우기로 결심하고 이를 조말생·이명덕 등에게 알렸다. 조말생과 이명덕이 이 소식을 신료들에게 전하자 이들의 의견은 분분해졌다.
당시 한상경 이하 20여 명의 신료들은 태종의 의견이 그렇고 또한 그것이 사리에 맞으니 당연히 양녕의 큰아들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박은·유정현·조말생 등 10여 명의 신료들은 양녕의 큰아들은 아직 어리니 대신 어진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이견을 제시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몇몇의 신료들은 점을 쳐서 후계자를 정하자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태종은 신료들의 의견이 분분하자 부인 민씨의 의견을 물었다. 민비는 양녕의 형제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면 훗날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며 양녕의 큰아들을 세자로 삼기를 원했다.
그런데 민비의 의견을 물은 태종은 양녕의 큰아들을 제쳐두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뒤의 세종]을 세자로 지명했다. 충녕대군은 박은·유정현·조말생 등이 어진 사람을 세워야 한다고 했던 바로 그 당사자였다. 이렇게 세종은 부왕 태종의 결단과 일부 신료들의 추천에 의해 세자로 지명된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한 후 곧바로 양위를 하려 했다. 그 사전 작업으로서 세자교체 5일 후에 세자에게 옥새를 넘겨주었고 7일 후에는 아예 전위절차까지 마쳤다. 태종이 전위한 목적은 무엇일까? 갑자기 권력의 무상을 느껴서일까?
태종은 세종에게 전위하고자 하는 이유를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 라고 했다. 사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올라 갖가지 악역을 담당했던 태종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권력과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만도 하다. 그러나 태종이 세종에게 전위한 실제 목적은 후계구도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했을 때에는 14년간이나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의 지지세력이 여전히 강력했다. 무엇보다도 양녕대군을 편애하던 태종의 부인 민비가 문제였다. 만약 태종이 민비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면 그 다음의 정치판은 기가 센 민비의 손아귀에서 놀아날 것이 뻔했다. 그럴 경우 양녕대군을 대신해 세자로 지명된 충녕대군이 어머니 민비를 대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태종이 기껏 구상해 놓은 후계구도가 엉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미리 전위하여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후계구도를 확정하는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태종은 세종이 즉위한 후 4년을 더 생존했다. 이 기간 동안 세종이 왕이었지만 모든 실권은 태종이 장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권력의 최후 보루라 할 병권을 태종이 틀어쥐고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세종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세종의 나이 30이 될 때까지 자신이 병권을 맡고 있겠다고 했다. 즉위 당시 세종이 22세였으니 앞으로 적어도 8년간은 더 병권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태종의 부인 민비가 태종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2년 후에는 태종도 사망했다.
부왕 태종이 사망한 후부터 세종은 명실상부한 국왕으로서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세종은 부왕이 닦아놓은 후계구도의 안정 속에서 자신의 포부와 경륜을 마음껏 펼쳤다.
출처: 조선왕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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