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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병자호란때 삼학사 '오달제' 죽검을 당해서 을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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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7-28 07:14 조회7,461회 댓글0건

본문

 위의 글씨는 나헌공의 글씨


인조 15년(1637) 4월 19일 오달제가 문초 당하다 오달제가 죽은 일

윤집과 오달제는 청나라 병사의 후진(後陣)에 있어서 이달 15일이야 심양에 도착하였다. 19일에 용골대가 재신과 강관을 아문에 불러들여 두 사람을 앞에 앉혀놓고 황제의 말로 묻기를,

“그대들이 화친을 단절하자는 의논을 앞장서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 하겠지만 특별히 인명이 지중하여 살려주고자 하니 너희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서 살겠는가?”

하니, 윤집이 대답하기를,

“난리 이후에 처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니, 천천히 들어보고 처신하겠다.”

하였고, 달제는 대답하기를,

“내가 참고 여기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다시 보려는 것이었다.
다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속히 나를 죽여라.”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저것이 황제가 살려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항거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이제는 다시 용서할 수 없다.”하였다. 

재신 
박황(朴潢= 나헌공)과  궁관(宮官)  이명웅(李命雄)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라 다만 임금과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하여
함부로 생각하였던 것을 말한 것이니 아무쪼록 그를 용서해 주시오.”

하면서, 간절히 부탁해 마지 않았다. 박황이어 뒤돌아보고 달제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유독 서서(徐庶)의 일1403) 일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대의 노친에게 그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게 하는 것이 비록 이역에 있다 하더라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니, 달제가 대답하지 않고 다만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호인(胡人)이 즉시 묶어다가 서문 밖에서 죽였다.
시체를 수렴하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달제가 끌려가는 도중에 시(詩)를 지어 그의 노모와 형에게 부쳤는데,
그 절구 1 수에 이르기를,

“孤臣義正心無怍,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聖主恩深死亦輕。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最是此生無限慟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北堂虛負倚門情。”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하였는데, 이 글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

[註 1403] 서서(徐庶)의 일 : 모친을 위하여 절개를 굽혔던 일. 조조(曹操)가 형주(荊州)에서 패배하고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아 서서를 부르니, 서서가 패업을 맹세했던 유비를 하직하고 노모를 찾아 조조에게로 간 일을 말함 《삼국지(三國志)》 권35(卷三十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오달제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경민(景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희문(希文)이고, 아버지는 윤해(允諧)이며, 어머니는 최형록(崔亨綠)의 딸이다.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典籍)·병조좌랑·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 때 후금이 세력을 날로 키우며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쳐 조선을 무섭게 위협해왔다. 이에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위협, 제지해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尹集)과 더불어 자진해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墨梅畫)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 화풍에 영향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림은 ≪묵매도 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 忠烈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나헌공 박황

1597(선조 30)∼1648(인조 2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우(德雨), 호는 나옹(懦翁)·나헌(懦軒). 소(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복(應福)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동열(東說)이며, 어머니는 정엄(鄭淹)의 딸이다. 사복시정(司僕寺正) 동언(東彦)에게 입양되었다.

162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4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대사간·이조참의를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화의에 반대한 척화신(斥和臣) 17인의 압송을 요구하자, 격분한 그는 “일대(一代)의 명사들을 모조리 호구(虎口 : 호랑이의 굴)에 보낼 수 없다. 한두 사람만 보내고 버티자.”고 주장하여 15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와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때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을 모함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사직하였으나, 곧 대사간에 등용되고 또다시 심양에 불려갔다가 돌아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644년심기원(沈器遠)의 역모에 연루되어 김해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전주부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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