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206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405

자유게시판

암행어사 일기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7-10 08:47 조회5,110회 댓글0건

본문

경부고속道 5배 걷고, 툭하면 들키고…

암행어사는 '3D(dirty, difficult,

dangerous)' 직업?

입력 : 2013.07.10 03:05

[어사 박래겸의 '서수일기'로 본 조선후기 어사 활약상]

'어사 출두'는 보름에 한 번꼴, 강행군에 과로사하는 어사도
피감 기관 '접대'도 받았지만 관리 횡포 억제하는 게 순기능

1822년(순조 22년) 4월 22일, 관서 지방을 비밀리에 순찰하던 암행어사 박래겸(朴來謙·1780~1842)이 말과 시종을 먼저 보낸 뒤 고개 위 나무 밑에서 혼자 쉬고 있었다. 마을 군관들이 갑자기 앞에 나타났다. "요즘 암행어사를 사칭해서 돈을 뜯어내는 자들이 있다는데…." "당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보니 수상한데 가짜 어사 아냐?" 허리춤에서 쇠사슬을 들춰내 체포할 기세였다.

다급해진 박래겸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너희들 혹시 이런 거 본 적 있느냐?" 마패였다. 군관들은 혼비백산하다가 자빠져 고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당시 가짜 어사가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진짜 어사의 신분 위장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암행어사 박래겸의 평안도 출두 과정. 박래겸 '서수일기'에 나오는 암행어사 에피소드.
조선 후기의 암행어사 활동 일지인 박래겸의 '서수일기'(西繡日記·푸른역사 刊)가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조남권 전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장과 박동욱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교수가 번역한 이 책은 1822년 3월 16일부터 7월 28일까지 126일 동안의 평안도 암행어사 기록이다.

암행어사 박래겸은 126일 동안 모두 4915리(里)를 이동했다. 1리를 400m로 계산하면 약 2000㎞를 이동한 셈으로, 경부고속도로(416㎞)의 5배에 가까운 거리다. 말을 타거나 걸어서 하루 평균 약 40리(16㎞), 많게는 120리(48㎞)를 가야 했다. 강행군을 하다 순직한 어사도 있었다.

'암행어사 출두'는 126일 동안 모두 8회, 보름에 한 번꼴로 실행됐다. 보안상의 이유인 듯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접 고을부터가 아니라 불규칙한 순서로 진행됐다. 주로 저물녘에 높은 문이나 관아의 문 앞에서 '출두야―!'를 외쳤고, 고을 수령의 부재 여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암행어사의 주요 권한인 '봉고파직' 중에서 관가의 창고를 잠가 버리는 봉고(封庫)만 두 차례 이뤄졌다.

'보안 문제'는 암행어사 업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고을 수령이 옛 친구인 경우엔 신분 노출이 두려워 만나지 못했고, 의심 많은 뱃사공이 자꾸만 캐물어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기생들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한 퇴기가 그를 보고 "떨어진 도포에 찢어진 신발 차림이지만… 버젓한 걸음걸이로 들어온 걸 보니 예사 분 같지 않소이다"라고 하자, 들통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줄행랑을 놓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암행어사의 조사 방식에 이르러선,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그다지 엄정하지 않아 보이는 점도 드러난다. 피감 기관장인 고을 수령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유람선을 타고 시(詩)를 읊은 일, 그가 소개한 기생과 동침한 일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암행어사의 효과가 없지는 않았다. 박래겸이 민가를 지나던 중 한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암행어사 온다, 뚝!" 그가 이유를 묻자 노파는 "어사가 암행한다는 말을 듣고 마을 관리들이 모두 덜덜 떨기 때문"이라며 "살기가 편해졌으니 자주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죄를 다스리는 일에 앞서 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암행어사의 순기능이었다는 얘기다.

암행어사, 넉달간 서울∼부산 6배거리 이동…‘서수일기’ 분석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 기사입력 2005-12-19 04:35 | 최종수정 2005-12-19 04:35

 

 

엄격한 상하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파격적인 ‘액션과 로망’의 주인공이었던 암행어사에겐 어떤 고락이 숨어 있었을까.오수창 한림대 교수가 ‘역사비평’ 겨울호에 기고한 ‘암행어사의 길-1822년 평남 암행어사 박내겸(朴來謙)의 성실과 혼돈’에서 그 속내를 엿볼 수 있다. 1822년(순조 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4개월간 활약한 박내겸이 자신의 임무 수행을 일기로 남긴 ‘서수일기(西繡日記)’를 분석한 글이다. 오 교수는 이 글에서 박내겸의 구체적 행적과 함께 암행어사와 다른 기록들을 참조해 암행어사에 대한 궁금증과 오해를 풀어주고 있다.박내겸의 경우, 암행어사를 신비롭게 보이게 하는 신분의 비밀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암행어사로 임명되는 즉시 비밀리에 목적지를 향해 떠나야 하지만 박내겸은 본가로 가서 부모에게 하직하고 닷새 후에 떠난다. 19세기 정승을 지냈던 정원용의 기록에 따르면, 어사로 임명된 사람들이 출발할 때 친구들과 송별잔치까지 벌이는 바람에 막상 활동지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분이 노출된 경우가 허다했다고 지적했다.박내겸도 길을 떠난 지 3일 뒤 황해도 금천을 지나는데 벌써 암행어사 행차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심지어 함종이라는 고을에서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가짜 암행어사가 두 차례나 지나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또 어느 고을에서는 그의 행적을 보고 가짜 암행어사가 아닌지 수상하게 여긴 관헌의 단속을 받아 마패를 보여 줬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박내겸은 비교적 성실한 암행어사였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데 투철하지 못했다. 평양에 처음 잠입했을 때는 평안 관찰사를 잘 안다며 제 발로 찾아가 인사를 했는가 하면 성천에서는 친구인 성천부사 이기연과 기생 잔치를 벌이며 놀았다. 암행어사의 임무는 육체적으로도 고된 것이었다. 오 교수는 박내겸이 서울을 출발해 임무를 마치고 임금 앞에 나가 보고할 때까지 125일간 4915리(최대 2654km·1리를 0.54km로 계산)를 이동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경부고속도로의 6배에 이르는 거리다. 말을 타거나 걸어서 하루 평균 40리(21km)를 이동한 셈인데, 많게는 하루 120리(최대 64.8km)를 이동했다고 한다. 또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관청에서 굶주린 자들에게 내리는 죽사발을 받아먹기도 하고 빗속에서 숙소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그러나 일단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암행어사 출두가 이뤄지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쾌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출두”를 외칠 때 짜릿함이 있었다. 박내겸은 자신이 평양 대동문에 올라가 출두를 외칠 때 “성내가 온통 끓는 솥처럼 되어 사람과 말들이 놀라 피하는 것이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밀려드는 듯했다. 평안도에 나온 이후 으뜸가는 장관이었다”라고 묘사했다. 또 관기와의 동침 등 육체적 쾌락도 뒤따랐다. 종2품인 평안관찰사가 종5품에 불과한 박내겸이 출두한 뒤 세 차례나 직접 찾아와 만났는가 하면 대동강에 배까지 띄워 낮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유흥을 베풀었다.암행어사의 길은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 임금의 신임이 그만큼 두텁다는 증좌이기 때문이다. 실제 43세에 홍문관 부교리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발탁된 박내겸은 이후 함경도 북평사를 지내고 청나라에 외교사절로 다녀왔으며 최종 벼슬은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흔히 암행어사의 권한으로 알려진 ‘봉고파직(封庫罷職)’ 중 어사의 실제 권한은 관청의 창고를 봉해 수령의 업무를 정지시키는 ‘봉고’에만 국한됐다. 지방관의 파직은 그것을 주청하는 일조차 어사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고 오 교수는 덧붙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