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서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도 한림원 명예 철학박사,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교수, 크리스천 아카데미 부원장, 스위스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 국장과 아시아 정책위 의장을 역임하였다. 황조근정훈장을 비롯하여 네팔․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스리랑카에서 인권상 및 공로패 등을 받았다. 국가 인권위원회 상임위원,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를 지낸 박경서에게 ‘세계와 내가 관계 맺는 법’에 대해 듣는다.
법’에 대해 듣는다.
<인권대사 박경서 인터뷰 영상>
요즘 사회심리학에서는 어렸을 때의 기억 가운데 충격적으로 뇌에 입력된 것은 훗날 한 사람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내 유년에 경험한 전쟁은 나를 폭력에 대한 거부의 삶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어요. 나는 갈대밭으로 유명한 저 남쪽 순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일제강점기여서 일본 말로 구두시험을 치고 학교에 들어갔지요. 그리고 1학년 때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36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라를 찾지 못했었기 때문에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사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났어요. 군인과 경찰들이 서로 총질을 하고, 대낮에 시민들을 아스팔트 위에 꿇어앉히고, 맑은 물이 흐르던 개천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 기억이 내게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리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나는 외갓집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내 눈앞에서 외할머니, 외숙부, 외숙모가 소위 빨치산에 의해 죽어갔습니다. 나의 유년의 기억에는 아름다운 추억도 많지만, 이렇듯 내 민족이 당한 서러움과 한이 더불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때 각인된 폭력에 대한 경험, 전쟁이 가지고 오는 인간 최악의 비극을 목격하면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런 기억이 이라크전쟁 반대에 앞장서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진보의 생각과 보수의 생각이 공존합니다. 그렇게 태어났어요, 인간은. 사회 또한 마찬가지고요. 내가 4·19혁명에 앞장섰을 때에는 진보의 생각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정선거는 안 돼’ ‘새로운 세상이 와야 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가려면 부정선거는 없어야 해’ 하는 생각들이 젊은이들의 뇌리에 콱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나도 이제 일흔이 넘어 늙으니까 나도 모르게 보수가 돼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고, 그게 아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보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됩니다. 젊었을 때에는 세상에 대해서 고민도 하고, 아버지 어머니의 고생도 생각해보고 해야 합니다.

나는 학문이라는 것은 비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깊게 하고 있었고, 그러한 이유로 사회학을 선택했습니다. 사회과학, 특히 사회학은 현재 존재하는 사회질서를 비판하고, 사회 부조리에 대한 대안모델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4·19혁명은 당시 우리나라에 팽배해 있던 여러 가지 부조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었고, 의식개혁운동이었습니다. 사회학과 학생회장이었던 나는 국민계몽운동, 새생활운동, 부정선거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 땅에 부정선거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전국을 돌며 순회강연도 했습니다. “여러분, 막걸리 줬다고 절대로 표를 팔지 마세요. 당신의 표는 당신 양심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하면서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하는 4·19혁명의 정신은 내 삶에도 영향을 주어, 내 생애에 ‘거짓말 안 하는 삶’을 보태줬습니다. 그렇게 나는 4·19혁명에 앞장섰고, 지금도 그걸 퍽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내가 강원용 목사님하고 같이 만들어낸 게 중간 집단 교육입니다. 그 중간 집단 교육의 철학이 ‘가운데에 서서 둘을 추슬러 제3의 길로 도약한다’는 거예요. 그때에 나는, 강 목사님도 생각이 같았습니다만, ‘우리나라가 언젠가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민주주의가 오면 각 분야의 리더들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래를 보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지도력 양성 프로그램을 하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1974년부터 중간 집단 육성 프로그램으로서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지요. 그러다 이른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이 터졌습니다. 1979년 3월 9일부터 직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260~270명의 교육생들이 중앙정보부에 가서 곤욕을 치렀어요. 강원용 목사님이나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고요. 큰 고생은 안 했습니다만, 그런 것들이 내게는 하나의 고귀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오늘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희생한 많은 학생들과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민주주의의 의지를 꺾지 않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자유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쟁취한 나라는 동북아시아에서 한국이 유일무이합니다. 그건 일본도 못 했고, 중국도 못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전 세계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더 좋아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젊은이들에게 한국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세계를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계의 눈으로 내 나라를 보라고 말이지요. WCC의 아시아국 책임자로 일하면서 ‘한국의 정서가 세계에서는 안 맞는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일례로 아시아 국장으로서 나는 중국, 베트남, 북한 등 사회주의국가들도 여행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내 여권으로는 그 나라들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사무총장한테 가서 “미안하지만 나는 사회주의국가에는 못 가게 되어 있습니다” 했더니, “그럼 우리가 아시아 국장을 잘못 뽑았는데? 너희 나라로 돌아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 세계에서도 당연한 것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결국엔 대통령에게 사회주의국가도 여행하게 해달라고 탄원서를 썼고, 그렇게 특별 허가를 받아서 사회주의국가들과 북한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내가 귀국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나라에서 많은 해답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미국이 모든 질문에 답을 줄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라는 것이에요. 세계에는 20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도 있고 부자인 나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각 나라마다 배울 게 많이 있습니다.
독일의 전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박사가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그 천인공노할 죄악과 여러분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학생뿐 아니라 이곳 베를린 대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외국 학생까지 모두 히틀러가 지은 죄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죽을 때까지 히틀러가 지은 죄를 사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듯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는 민족도 세계에는 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고귀한 영성을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 봉사의 마음, 훌륭한 인격을 우리는 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나 또한 북한 지도자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몇 사람이 잘살기 위해서 2400만이 굶는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21세기에 어떻게 권력을 3대째 세습할 수 있습니까? 난 그건 절대로 찬성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핵심 공산주의자들뿐이라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하는 거고, 그 수는 내 생각에 아마 천 명 정도 될 거예요. 그러면 그 천 명이 미워서, 북한에서 태어난 죄밖에 없는 우리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모르는 체해야 할까요?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1997년 11월 함흥 제1도립병원 수술실에서 수술을 받던 환자 두 명이 혈압을 높이는 약이 없어서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수술을 하면 피를 많이 흘려 혈압이 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혈압을 높이는 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렇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을 모르는 체할 수 있겠어요? 그럴 수는 없지요. 그래서 나는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당시 10년 동안 가동을 못 하던 제약공장에서 혈압을 높이는 약, 진통제, 종합비타민제 등 다섯 가지 약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고, 지금도 그 공장은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평화학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내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프면 온 식구가 다 아픈 것입니다. 나머지 가족은 육신은 건강해도 마음이 아픈 것이고, 가족의 행복권은 사라지는 것이에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 그룹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완전히 처져버렸다, 왕따 당했다’고 아파하면, 우리 사회 전체가 불행한 것입니다. 또 탈북자들이 잘 살고 싶어서 왔는데 못 살겠다고 하면 우리 사회 전체가 물음표인 것이에요. 국가인권위원회에 있을 때 조사를 해보니 우리나라에 온 탈북자들의 4.9퍼센트만이 행복하다 그러고, 45퍼센트는 괜히 왔다 그래요. 나머지 50퍼센트는 아직 모르겠으니 나중에 얘기해준다 그러고요. 그 이유가 첫째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고, 둘째로는 자신들을 백안시하고 폄하하는 남쪽의 눈초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자본주의가 너무 어려워서 적응하기 힘들다 하고요. 그러면 이 두 번째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탈북자와 우리는 어차피 하나고, 같이 살아야 되니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같이 사는 북한 사람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남쪽 사람도 배가 고파야 하는 것이에요. 이런 식의 사고가 바로 평화학입니다.
1996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조제 하무스 오르타 동티모르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생생합니다. 하루는 제네바의 내 사무실에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유럽 사람이 한 명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는 아시아국이니, 유럽국으로 가셔라” 했더니, 자기는 아시아 사람이라는 거예요. 자기 어머니는 포르투갈 사람이고, 아버지는 동티모르 사람인데, 동티모르가 450년 동안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것을 아느냐고 내게 물어요. 그러면서 자기 민족의 한과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UN인권이사회에 가서 연설을 하려는데, 아시아 국장의 추천서가 필요해서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렇게 추천서를 들고 가서 UN에서 연설을 하는데, 거기 모인 400명을 그 사람이 울려버렸어요. ‘이 작은 나라를 독립시켜주십시오’ 하는 그 간절함이 모두를 감동시켰던 거죠. 그리고 2003년에 동티모르는 독립을 했고, 2007년에 오르타는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식민지였다 보니 100만밖에 안 되는 동티모르 국민들이 앙골라파·모잠비크파·포르투갈파·인도네시아파·국내파로 갈라져서 치고 받고 싸우는 거예요. 그 사람 죽기 전 소원이 ‘100만 명 밖에 안 되는 자기 민족이 서로 화합하면서 부둥켜안고 사는 그날을 보는 것’이랍니다.
빈곤 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자신이 세운 그라민은행과 공동으로 2006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무하마드 유누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하고 미들테네시 주립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유누스는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내가 지금 미국 학생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과 내 조국의 가난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금 허튼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1972년에 봇짐을 싸가지고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고 해요. 그런데 10년 만에 돌아온 고국은 자기가 떠날 때와 똑같이 가난하더랍니다. 고리대금업자가 추수한 곡식을 이자로 다 가져가서 극도의 빈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죠. 당시 고리대금업자에게서 한 가족을 해방시키려면 27불이 들었는데, 자기 퇴직금을 27불로 나누었더니 마흔두 가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답니다. 그렇게 마흔두 가족에게 자기 돈을 빌려주는 것을 시작으로 마이크로크레딧 운동, 즉 무담보 소액대출 운동을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커져서 지금은 800만 명이 이용하는 그라민은행이 된 것이고요.
그라민은행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담보로 돈을 빌려주지만, 그 회수율이 99퍼센트에 이를 정도입니다. 그 성공의 이유를 유누스는 다음과 같이 밝혔어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은 땅문서 잡고, 집문서 잡고, 유능한 변호사를 입회시켜 보증을 세운 다음에 돈을 빌려줘도 리먼브라더스처럼 흔들흔들한다. 그러나 우리는 땅문서, 집문서 대신 가난한 사람들의 영성과 인격을 저당 잡았고, 그것이 성공의 이유다.” 이런 참신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세계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나는 포괄적 접근이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무엇이 ‘제1’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하나가 1등이다’ 하는 게 중요하지 않고, 우리 사고에서 ‘1등이 최고다’ 하는 것을 버릴 때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 안에서는 여러 가지 가치가 매끄럽게 공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공동선의 구성 요소 모두가 골고루 잘 화합하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경제도 중요하고, 평화도 중요하고, 북한의 핵을 없애는 문제도 중요하고, 정의·봉사·환경의 문제 등 모든 것들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인권은 허공에 떠 있는 가치가 아니라, 자기 피와 살로 몸 속에 용해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일례로 독일,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등에서는 술을 마시면 운전대를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예요. 독일에서 같이 공부한 일본인 친구가 혜화동 로터리에서 음주 운전 단속하는 것을 보고 뭐 하는 거냐고 물어요. 그래서 술 마신 사람 단속하는 거라고 했더니, ‘아니, 너희 나라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는 사람들이 있느냐’고 놀라요. 또 한번은 새벽에 택시를 탔는데 창경궁 앞의 빨간불에서 택시가 그냥 가버려요. 뒤를 돌아보니 다른 차들도 마찬가지예요. 함부르크, 취리히, 워싱턴 DC, 뉴욕, 런던,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인권이 내면화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빨간불에서는 브레이크를 잡는 것. 그것이 됐을 때 한국은 인권 선진국이 되는 것입니다.

인권 운동은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아요. 나는 우리나라의 정신대 문제를 국제노동기구에 가서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이 1967년 강제노동금지규약에 들어갔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을 강제로 데려가서 노역시킨 것으로 제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투경찰제도 때문에 우리가 그 규약에 들어가질 못하고 있어요. 전경제도를 폐지해야 거기에 들어가서 정신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그러려면 또 우리나라 시위문화가 걸리는 것이죠. 마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이 이거 해놓으면 저게 걸리고, 저거 해놓으면 또 이게 걸리고……. 또한 우리는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과 함께 베트남전쟁에서 똑같은 짓을 한 우리의 잘못도 베트남 국민들에게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트남도 캄보디아에서 똑같은 짓을 한 잘못을 빌어야 하죠.
인권·평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첫째, 다분야적 접근을 해야 합니다. ‘인권’ 하면, 정의도 생각하고, 평화도 생각하고, 민주주의도 생각하고, 타인도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다차원적인 접근을 해야 해요. 내가 지금 서울에 있다 하면, 도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UN은, EU는, OECD는 뭐라고 하는지를 함께 봐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자간 접근을 해야 합니다. 나도 하고, NGO도 하고, 정부도 하고, 그 다음에 국민 다른 사람도 하고 등등. 이런 사고를 하는 것이 바로 ‘포괄적 접근’입니다. 인권은 또한 당사자 중심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교사의 인권은 교사가 풀어야 하고, 노동자의 인권은 노동자가 풀어야 해요. 다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화를 통해서 해야 합니다. 그것을 파괴적으로 해서는 안 돼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개인의 인권과 공동체의 인권이 부딪칠 때에는 공동체의 인권을 따라야 합니다.
나는 전쟁이 평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라크전쟁을 한번 보세요. 물론 하루아침에 폭탄테러로 무고한 백성이 3000명이나 죽어버렸으니 그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컸을지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UN의 해결책 없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전쟁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미국 군인을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수니파와 시아파는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소개하겠다는 미국의 목표는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나는 2007년에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60년 넘게 분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토만 둘로 나뉜 게 아니라 우리 민족도 둘로 나뉘어 버렸습니다. 한편에서는 전쟁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나는 후자에 속합니다. 그러니 오늘의 이 상은 내가 한국에 가서 후자의 운동을 더 하기 위해 가져가겠습니다.”

요즘에 나는 평화와 화해의 2분의 1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일리가 있고, 당신도 일리가 있다’고 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을 수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2분의 1 운동이에요. 나의 절반을 깎은 곳에 상대방의 깎인 절반을 들어오게 하는 것. 2분의 1 더하기 2분의 1은 하나이듯이, 하나가 되려면 나를 절반으로 줄여야 합니다. 일심동체는 결혼한 부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의 평화와 통일도 2분의 1로 줄인 남쪽에 2분의 1로 줄인 북쪽이 들어올 때만이 가능합니다. 이 2분의 1 운동은 결국 제3의 길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가 ‘소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진보와 보수가 소통이 안 되고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로만 계속 나가도, 진보로만 계속 나가도 한계에 부닥칩니다. 어느 나라든 진보와 보수가 소통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퇴보합니다. 때문에 진보와 보수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를 우리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나는 제자들에게 자주 ‘가운데에 서서 보수와 진보의 교량 역할을 해라’ 하는 주문을 합니다. 그런데 가운데에 선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잘못하면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낙인 찍히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량의 역할에만 머무르지 말고 ‘제3의 길로 도약’해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민주주의적으로 서로 인정을 하면 제3의 길은 항상 있습니다.
“거품을 빼고 정직하게 살자.” 남을 속이면 언젠가는 자기가 속임수에 빠지고 맙니다. 학문도 거품을 빼야 하고, 학위 했다고 서툴게 넘나들지도 말아야 해요. 공부 안 한 사람들 가운데 훌륭한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제 ‘타이틀 신드롬’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내놔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자꾸 거품으로 치장을 하려 합니다. 일례로, 죄송한 얘기지만 국회의원 6개월 했던 사람도 죽을 때까지 국회의원이고, 장관 며칠 한 사람도 죽을 때까지 장관입니다. 나 박경서는 무슨 박사도 교수도 아니고 그냥 ‘미스터 박경서’입니다.
‘나는 나와 함께 사는 사람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인권 선진국입니다. 세계에는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길거리에도 있고, 네덜란드에도, 노르웨이에도, 독일에 가도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세계가 원하는 젊은이의 상은 절대적으로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1등 했다고 뽐내는 사람? 그런 사람은 금방 고꾸라집니다.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금방 나오기 마련이에요. 나는 늘 제자들한테 “허례허식에 빠지지 마라, 거품을 갖지 마라, 일회성 이벤트를 하지 마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깊게 사고하고, 정직하게 살며, 겸손하라”고 주문합니다. 이런 것들이 내가 다음 세대에게, 나 박경서는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입니다.
<
박경서
1939년 출생.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도 한림원 명예 철학박사,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교수, 크리스천 아카데미 부원장, 스위스 제네바 소재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 국장과 아시아 정책위 의장을 역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