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심씨가 주장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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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4:15 조회1,783회 댓글0건본문
청송심씨가 주장하는 글
<자료1>"문중평론방" 작성자심재호
청송 심씨 심온은 세종의 장인으로, 세종 즉위 직후, 영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정사로 다녀오는 도중, 자신의 막내 동생 도총제 심정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자신과 이전에, 세자 책봉 문제로 다툰 적이 있는, 평소, 서로, 사이가 안 좋았었던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사사되었다. 문종 즉위 직후, 신원 복관작되었다. 32년간 관직 생활을 하였다.
<자료 2>“문중사료
심온의 옥 개요
심재호심온의 옥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께서, 명나라에,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사은사로, 떠나시자, 태종 이방원과 그의 심복인 좌의정 박은은, 평소, 사이가 안 좋고, 자신들의 비위에 거슬렸던, 세종의 외척이었던, 심온의 청송 심씨 집안을, 제거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태종 이방원과 좌의정 박은은, 꾀를 내어, 병조판서 박습, 병조참판 강상인을, 심온의 막내 동생인 의흥삼군부 동지총제 심정(일명 : 심청)에게 보내어, " 병권을 둘로, 나누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좋은가" 라고, 물어보라고 시킵니다. 그러자, 당연히, 심정은, "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좋다 " 라고, 말 할 수 밖엔, 없었죠... 그러자, 이 사실을 들은, 병조좌랑 안헌수가, 이 사실을, 태종에게, 고하자, 태종은, 갑자기 심기가 상한 듯, 먼저, 강상인과 박습을 잡아들여, 국문을 합니다. 국문에, 못 이긴 듯, 강상인은, 심정에게, 탓을, 돌립니다. 그러자, 태종은, 심정을 잡아들여,
<자료 3>
청송심씨 大同譜 首卷 顯祖史蹟
『요사이 상감의 뜻을 공은 알고 계시오? 상감께서 착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걱정이 없겠다.하니 대개 그뜻이 비록 선위를 보류하여도 걱정이 없다는 것을 말한것이다』
공께서는 이 이야기를 상감에게 알린 바, 상감께서는 박은의 의(義)롭지 못함을 느끼시고 박은이 공에게 한 말을 더욱 미워하여 즉시 상왕에게 상계하기를 박은은 진실하지 못한 신하라고 아뢰었다.
박은이 이말을 듣고 공을 원망한 나머지 급기야 공에게 사사의 화를 입게 하고 박은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모함하는데 갖은 힘을 다 하였다고 한다.
공께서는 임종 하심에 가인(家人)에게 경계유언 하시기를
『나의 자손은 대대로 박씨와 더불어 혼인하지 말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종4(1422) 5/9 금천 부원군 朴은의 졸기
태상왕이 임금에게 선위하려고 하였으나 드러내놓고 말하지못하였다.
은이 <그 뜻을> 짐작하여 알고 심온(沈溫)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임금의 의향을 그대가 아는가
또 말하기를, 임금의 처사는 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끝내 아무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내선(內禪)한다 할지라도 아무 탈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심온(溫)이 은의 말을 임금에게 알리니, 임금이 심온의 말을 옳게하고, 더욱 박은과 말한 것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여 곧 태상왕에게 계하였다. 태상왕이 선위한 뒤, 임금이 태상왕께 사뢰기를,박은이 어느 날 심온에게 내선한다는 일을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박은은 순결한 신하가 아닙니다. 하니,
태상왕이 말하기를,
박은은 내가 장차 내선하겠다는 말을 하였고, 박은이 직접 이것을 들은 까닭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하였다.
심온이 죄를 받게 되자 , 박은이 태상께 계하기를,
심온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자기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하니, 태상은 듣고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기를, 박은은 자기 반성은 할 줄 모르고 온의 세력부린 것만 허물하는가.하였다 김점金漸이 항상 조정에서 박은을 보면, 반드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그대의 등용한 사람은 다 그대의 집에드나 들던 자요, 우리들의 부탁한 사람은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니 옳은 일인가, 하니, 은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박은이 비록 친척을 많이 등용하였으나 조정의 명사를 다 뽑아 썼으므로, 남들이 심히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박은은 취마(뀄摩)의 재주가 있고, 임금의 의향을 잘 맞추어 나갔다.
『청송심씨 大同譜 首卷 顯祖史蹟 』
『조선왕조실록 세종4(1422) 5/9 금천 부원군 朴은의 졸기』
위의 두글의 앞부분은 같은 내용의 글이나 그 다음의 기록인
청송심씨 대동보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없는 기록을 조작을 하여
많은사람들에게 오해를 할수있도록 한다
<태종의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의 확립>
태종의 왕권강화를 위해 왕족 친인척. 공신등을 제거하는 정책을 알지 못하고 안효공의 죽음의 원인을 평도공에게 전가(轉嫁)한다.
태종의 왕권을 강화하기위한 정책의 실례(實例)를 알아 보자
태종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왕권에 위험이 되는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숙청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李居易) 난언 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李佇)를 귀향 조처하였고,(태종의 사위 이강백의 아버지는 이거이(李居易)로 일차왕자의난후 정사공신이다)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정치적 동지였던 처남들로서 권세를 누리던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일차 이차 왕자의 난때 태종을 도운 공신)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李茂), 윤목(尹穆), 유기 등을 각각 목 베었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 (閔無悔)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이숙번은 太祖 2년에 등과한 뒤 하륜(河崙)의 소개로 왕자의 난 때 적극 가담해 대공을 세운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승승장구하며 무관의 고위직을 두루 거친 그는 매우 방자했다. 太宗은 공신임을 내세워 방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숙번을 왕권(王權)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
1414년에 잔여 공신들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였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 군정을 도맡아 세종을 도왔는데,
『주상이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는 내가 친히 청단할 것이다. 국가에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은 의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각기 가부를 진달해 시행토록 하라. 나도 마땅히 가부 논의의 한 사람으로 참여할 것이다』
이는 軍國大事의 요체인 군사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이 결단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에 太宗의 뜻에 따라 군제개편이 이뤄졌다.
太宗이 우려한 바대로 上王인 그가 군사대권을 쥐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후일을 도모코자 하는 무리가 나타났다. 太宗의 의중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덫에 걸린 인물이 바로 병조참판 姜尙仁(강상인)이었다.
도총제 심정이 박습 강상인 등에게 호령(號令)에 대해 불평한 것이 화근이 되어 심정.박습.강상인.이관 등을 죽였다. 이때 심정의 형이던 영의정 심온(세종의 장인)은 자진(自盡)하였다.
심온이 죽게된 원인이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것으로
태종은 자신의 사후 외척이나 공신들의 득세를 우려했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는 세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으로 판단, 거의 모든 부정부패와 불충까지 용서해 주었고,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이들이 이후 득세해 왕권을 농락할 것을 우려, 없는 죄까지 만들어 몰락시켰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세종실록 세종원년 9월 8일(을묘) / 상왕과 임금과 중궁이 각각 환관을 보내어
연서역에서 심온을 전송하다
상왕이 환관 황도(黃稻)를 보내어 문 밖까지 심온을 전송하게 하고, 임금은 환관 최용(崔龍)을, 중궁(中宮)은 환관 한호련(韓瑚璉)을 각가 보내어 연서역(延曙驛)에서 심온을 전송하게 하였다. 심온은 임금의 장인으로 나이 50이 못되어 수상(首相)의 지위에 오르게 되니, 영광과 세도가 혁혁하여 이날 전송 나온 사람으로 장안이 거의 비게 되었다.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을 들어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외척의 정사 금지는 꼭 임금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태종 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의 처남(妻男)이었던 대호군(大護軍) 전맹겸(全孟謙)이 저자 사람의 생선을 빼앗자 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경시서(京市署)는 즉각 고발했고 사헌부도 그를 논박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부인 숙빈(淑嬪)을 생각해 용서했으나 두 기관은 재차 고발했고, 태종은 할 수 없이 태(笞) 40대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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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척 심온을 제거할 꼬투리 >
“사화로 보는 역사“ 이덕일 지음 석필출판사 184~189 쪽
태종이 선위 직후 조선의 임금이 누구인지를 내외에 과시한 사건이 있었다.
자신의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인 영의정 심온의 옥사가 그것이다.
태종때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이 또한 태종이 지나친 권력 집중욕과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영의정인 심온을 사은사로 삼아 양위사실을 알리고 명나라의 승인을 받게 했다.
영의정이자 국구인 심온이 먼 길을 떠나자 나라안의 많은 사대부들이 나와서 인사를 했다.
심온이 임금의 장인인 까닭도 있었지만 사신이 외국으로 떠날 때 서로 인사하는 것은 하나의 관례였다.
심온을 전별하는 거마가 장안을 뒤덮을 절도로 위세당당했다는 보고를 들은 태종은 불쾌했다.
더구나 심온은 태종이 그토록 발호를 두려워하는 외척이엇다. 하지만 심온을 다스릴 죄명이 없었다.
사행길에 전별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벌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하지만 찾으려고만 한다면 꼬투리가 없을 수가 없는 법이다.
태종은 한 달 전에 있었던 병조의 사소한 문제를 끄집어냈다.
병조의 사소한 문제란 병조참판 강상인이 총재 심정과 함께 임금의 호위를 맡은 금위 소속의 군사를 배치하면서 이를 세종에게만 아뢰고 상왕 태종에게 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총제 심정은 왕실을 호위하는 핵심 중앙 군사력인 삼군총제부를 뜻하는데 ,(中略). 말하자면 오늘날 대통령 경호부대다.
태종은 군사 배치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은 뜻이 혹 군권을 세종에게 속하게 하려는 뜻인지 의심했다.
中略
“국군에 관한 정사는 내 친히 결재하거늘 지금 병조에서 순찰하는 일만을 아뢰고 다른 군사에 관해서는 고하지 않는구나. 이런 의견을 처음 낸 자가 누구냐? 만일 숨기는 자가 있다면 엄벌에 처하겠다.”
병조의 관원들이 떨며 대죄하였다. 문제는 병조판서 박습이 이를 미리 알고있었느냐 하는 점에 있었다.
원래 군병은 도총부에서 주관하고 금위의 병사는 병조참판과 병조좌랑이 주관하므로 병조판서에게는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다. 하지만 태종은 병조참판 강상인과 총재 심정은 물론 병조판서 박습을 비롯해
정랑 좌랑등을 모두 의금부에 가두어 심문하였다. 강상인과 심정은 태종에게 미리 고하지 않은 자신들을 변호했다. (中略)
병조판서 박습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중약)
하지만 총재 심정이 명나라에간 영상 심온의 동생이었던 점이 문제였다.
바로 이 점에 태종의 과녁이 맞충져 있었던 것이다. 엄한 죄를 요청하지 않았다 하여
태종에게 여러번 질책을 당한바 있던 형조와 양사에서 거듭 주청해 이들의 죄는 귀양으로 정해졌다.
이사건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 심온에게 까지 불똥이 튈줄은 태종을 빼놓고는 그누구도 예상할수 없었다
경연이 폐한후 여러대신과 신하들이 상왕의 궁에들어와 알현했다.
태종이 심온에 대해 불편한 내색을 보이자 병조좌랑 안헌오가 이뢰었다.
심정이 박습 강상인과 함께 사사롭게 말을 난눌때 ‘지금 명령이 상왕과 주상의 두곳에서 나오니
이는 한곳에서 나오는것만 못하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곳’ 이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中略)
태종이 아닌 세종을 가르킴은 분명한것이다.
병조좌랑 안현오는 강상인 심정등과 주도권을 다투던 상항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것이 었다.
이말에 노한 태종이 박습.강상인 심정을 유배지에서 잡아들여 다시 국문했다.
(中略)
강상인은 태종이 잡으려는 인물이 심온임을 알고있었다.
심온을 끌어드리려면 그의 동생 심정을 연루시켜 자백해야했다
심정은 당연히 혐의를 부인했다.
강상인에게 또다시 압슬형을 가하자 이번에는 직접 심온의 이름을 댔다.
“제가 심온에게 호위 병사를 두 궁에 분속시키려면 갑사가 부족하니 삼천명을 증가해야 겠다.”고 말하고
이어 ‘군무는 마땅히 한곳에 돌려야한다’고 말 했더니 심온역시 옳다고 했습니다“
태종은 바로 이런 자백을 듣기 위해서 이들을 국문한 것이다.
(中略)
심정은 고문자의 의도에 굴복했다. 형인 심온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박습역시 고문에 못이겨 심온을 끌어 들였다.
中略
태종은 이들에 대한 처리를 좌의정 박은과 우의정 유정현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정사 좌명공신이었던 박은과 유정현은 이옥사를 새로이 실력자로 부상한 심온을 제거할 기회로 여겼다.
이들에게는 심온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中略
즉 심온이 세종에게 군권을 돌리려 했으므로 대역죄로 죽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中略
“심온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죄상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의논해 아뢰라“
태종은 조기 형집행을 멸령했다.
이에 유정현이 나섰다. “박습등이 이미 자복하였으니 하루라도 형을 늦출수 없습니다."
박은도 이에 동조했다.
中略
그리고 이욱을 금부진무로 삼아 의주로 보내 명에서 귀국하는 심온을 잡아오게 했다.
심온은 태종의 성격으로 보아 자신이 살아갈 길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中略
심온은 수원으로 압송된 후 사사 당했다.
심온은 사약을 마시기 전 “내가 이렇게 된것은 좌상 박은의 모함으로 인함이니
이후로 박씨와는 혼인을 하지말라“
원한이 흉부 깊숙이 박혔음을 알수있다.
하지만 박은은 종범이고 주범은 태종이었다
왕실과 혼인 하지 말라고 했어야 제대로 짚은 것이다.
흔히 세종(世宗)을 조선조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꼽고 있으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그의 치세(治世)는 태종(太宗)의 통치 리더십이 결실을 맺은 善果(선과)였다. 태종(太宗)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종(世宗)의 성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이 역사학자들은 심온이 태종의 왕권강화책 때문에 희생된 것으로 보고있다.
우리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하고, 평도공에 대한 행적과 역사사실을 심도있게 연구해야 할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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