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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러시아에서 박찬오의 공식적인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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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5-08 16:09 조회3,6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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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난번에 러시아 우랄공대에서 박찬석이라는 인물이 발견되어서 박찬오와 동일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이후 교민 사업가에게 학적부 조사를 의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사업가가 우랄공대를 방문하여 학적부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안타깝게도 박찬석이 박찬오와 동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박찬오는 1923년 3월 2일생인데 박찬석은 1923년 5월 13일로 나왔기 때문에 결국은 동일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 사업가가 또 한명의 인물을 찾았는데 박순옥이며, 생일은 1923년 7월이었는데 역시 박찬오와 동일인으로 보기는 희박하였습니다.


우랄공대 고문서 담당자가 사업가에게 전한 바로는 우랄공대에서 박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1923년생은 더 이상 없다고 하였으니 그러한 소식을 들은 저의 허탈한 심정은 이루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1993년 4월 27일 박찬오의 판결문을 발견한 순간부터 20년동안 행적을 조사한 저로서는 그야말로 그나마 믿었던 실날같은 희망이 사라지는 그런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적인 심정속에서도 저의 뇌리에 떠오른 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소련군정기 북한의 교육" 이라는 책이었는데 이 책은 작년에 박찬오의 새로운 행적을 발견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구입한 책이었습니다.


제가 이 책이 떠올랐던 것은 p.98에 있는 "1947/48학년도 북한유학생의 소련 고등교육기관 입학 현황" 이라는 자료때문이었습니다.


이 자료에 우랄공업대학을 포함하여 여러 대학이 등장하였는데 특히 저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대학이 있었으니 그것은 "스베르들롭스크 광산대학" 이었습니다.


제가 박찬오의 판결문을 발견한 이후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해방 이후 그가 우랄산맥 스베르들롭스크에 있는 공과대학으로 유학갔다는 것이 그에 대한 최초의 단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특히 공과대학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 자연히 우랄공대를 주목하였던 것이며, 이러다 보니 같은 스베르들롭스크에 위치한 광산대학을 그리 눈여겨 보지 않은 실수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랄공대에서 마저 박찬오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사업가에게 광산대학을 말씀드리니 비록 공과대학과는 별개의 학교이지만 일단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오늘 우랄공대에 온 김에 그 학교도 방문하여 의뢰를 한 이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로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으니.....


저와 통화가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서 사업가로 부터 연락이 왔으니 광산대학에서 박찬오의 기록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저로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부탁드린 것인데 바로 거기서 20년동안 그리도 오매불망 알고 싶었던 박찬오의 성함이 발견되었던 것이니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앞으로 학적부 조사라는 최종단계가 남아 있기는 하나 이번에는 우랄공대와 같이 동일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박찬오가 과연 무엇을 전공하였으며 당시 러시아에서 언제까지 체류하다가 북한으로 다시 간 것인지 그 부분이 촛점이 될 것이기 때문에 우랄공대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해방이후 러시아로 유학의 길에 올랐던 박찬오의 존재가 막연한 추정이 아닌 공식적인 그의 흔적이 발견되어서 이 감개무량한 심정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박찬오의 러시아 유학시절과 관련된 기초적인 단서는 발견하였으니 이를 바탕으로 그가 언제 북한으로 가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1963년 평양에서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의 행적을 추적할 생각입니다.



2013년 5월 7일(화)  칼럼니스트  문 암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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