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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박약회(博約會) 서계종택(西溪宗宅) ,노강서원답사기( 鷺江書院 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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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우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8 13:57 조회1,7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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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종택, 노강서원 답사기

어제(7월 20일)는 인터넷박약회가 수락산기슭의 서계종택과 노강서원을 답사했다. 명문의 후예로서 부자분이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면서도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마다하고 소신과 절의로써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으며 깨끝한 선비의 이름을 후세에 남긴 청절지사의 유적이다.

수락산자락의 개울 가 숲속에는 고풍스러운 양반가의 사랑채 하나가 홀로 서 있고 뒤에는 서계선생영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계종택이다. 아무런 현판도 주련도 걸려있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어서 모두 소실된 후에 다시 지은 것임을 짐작케 했고 1800년경에 중건한 것이라 했다. 뜰 앞에 우뚝 선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증명해 주는 듯 했다.


셔계(西溪) 박세당(朴世堂)선생(1929~1703)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병조정랑(兵曹正郞),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등 핵심직위를 역임하면서 사회개혁과 실리외교를 주장하였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자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을 끝으로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先代에 받은 사패지(賜牌地)(60결; 약 20만평)의 일부를 개간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학을 연구하고 학문을 연찬하였다.

주자학일변도의 테두리를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적 태도를 견지했던 선생은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백성을 위한 농사지침서인 "농경(農經)"을 저술하기도 했고 학문의 폭을 노장학(老莊學)에까지 넓혀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새로운 주석을 단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을 저술하기도 했다.


주자학에 회의적이었던 선생은 사서삼경(四書三經)(주역만 미완성)의 주자이론을 비판하고 독자적견해를 밝힌 "사변록(思辨錄)" 14편을 저술한 것과,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쓰고 지탄을 받았던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쓰면서 그를 두둔한 것이 빌미가 되어 노론(老論)계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낙인이 찍히어 삭탈관작(削奪官爵)되고 75세의 노구로 유배길에 올랐다가 겨우 풀려나 이곳 석천동에서 서거했다.


서계종택에서 개울을 따라 노강서원으로 올라가다보면 왼편으로 석천계곡에 작은 정자 궤산정이 서 있다. 서계선생이 학문을 닦으며 쉬던 곳으로 "위산구인(爲山九仞) 공적일궤(功虧一簣)"라는 서경(書經) 족오편(旅獒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홉길 산을 쌓아 올리다가 한 삼태기 흙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모두 허사가 된다." 는 뜻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와 교훈을 담고 있는 정자이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서도 관리가 소홀하여 퇴락하여 가고 있음이 안쓰럽다.

좀 더 올라가면 노강서원 가까이에 청풍정(淸風亭)터가 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선생이 은거하면서 지었던 정자가 빈 터만 남아 있는 것이다. 절의(節義)의 선비 서계선생이 매월당을 숭모하면서 거닐었던 청절(淸節)이 스며배인 곳이어서 서울 노량진에 있던 노강서원을 복원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단다.


서계선생의 아드님이신 정재(定齋) 박태보(朴泰輔선생1654~1689)을 모신 노강서원(鷺江書院)은 노강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원래 선생이 유배길에 서거하신 노량진에 세웠었는데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복원하면서 1969년에 선생의 세거진(世居地)인 이곳으로 옮겼단다. 간소한 신축건물이면서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선생의 충절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사액서원(賜額書院)임이 감안되었을 것이라 했다.

박태보선생 역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출세가도를 걸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 서계선생처럼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던 선생은 장희빈(張禧嬪)에 빠져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내치려는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에게 목숨을 걸고 충간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가혹한 고문 끝에 겨우 참형을 면하고 원지에 부처되던 중에 겨우 노량진을 건너 장독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정권이 바뀌자 갑술환국(甲戌換局) 충신을 처벌한 것을 후회하고 사면복권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신 후였다. 백성들이 선생의 충절을 얼마나 숭모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얼마나 애석해 했던지 개인전기소설(個人傳記小說)이란 찾아보기 어렵던 그 시절에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과 함께 '박태보전(朴泰輔傳)'이 나와 후세까지 전해지면서 널리 읽혔다고 하니 서계(西溪), 정재(定齋) 부자분의 지조와 절의는 만고의 사표가 될 것이다.

친절한 안내와 과분한 후의를 베풀어 주신 서계종택 여러분과 이를 주선하신 임원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2007 . 7. 21     觀 齋(관재)    朴 完 鍾(박완종)


-(원문)-

             西溪宗宅, 鷺江書院 踏査記

어제(7월 20일)는 인터넷博約會가 수락산기슭의 서계종택과 노강서원을 답사했다. 명문의 후예로서 부자분이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면서도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마다하고 소신과 절의로써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으며 깨끝한 선비의 이름을 후세에 남긴 淸節志士의 유적이다.

수락산자락의 개울 가 숲속에는 고풍스러운 양반가의 사랑채 하나가 홀로 서 있고 뒤에는 西溪先生影眞閣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계종택이다. 아무런 현판도 주련도 걸려있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어서 모두 소실된 후에 다시 지은 것임을 짐작케 했고 1800년경에 중건한 것이라 했다. 뜰 앞에 우뚝 선 수령 400여 년의 은행나무가 역사를 증명해 주는 듯 했다.


西溪 朴世堂선생(1929~1703)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成均館典籍을 시작으로 兵曹正郞, 弘文館校理 등 핵심직위를 역임하면서 사회개혁과 실리외교를 주장하였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자 聖節使書狀官을 끝으로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先代에 받은 賜牌地(60결; 약 20만평)의 일부를 개간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학을 연구하고 학문을 연찬하였다.

주자학일변도의 테두리를 벗어나 實事求是적 태도를 견지했던 선생은 직접 농사를 지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백성을 위한 농사지침서인 "農經"을 저술하기도 했고 학문의 폭을 老莊學에까지 넓혀 老子의 道德經에 새로운 주석을 단 "新注道德經"을 저술하기도 했다.


주자학에 회의적이었던 선생은 四書三經(주역만 미완성)의 주자이론을 비판하고 독자적견해를 밝힌 "思辨錄" 14편을 저술한 것과, 三田渡碑文을 쓰고 지탄을 받았던 白軒 李景奭선생의 神道碑銘을 쓰면서 그를 두둔한 것이 빌미가 되어 老論계로부터 "斯文亂賊"으로 낙인이 찍히어 削奪官爵되고 75세의 노구로 유배길에 올랐다가 겨우 풀려나 이곳 석천동에서 서거했다.


서계종택에서 개울을 따라 노강서원으로 올라가다보면 왼편으로 석천계곡에 작은 정자 궤산정이 서 있다. 서계선생이 학문을 닦으며 쉬던 곳으로 "爲山九인(人변에 刃: 길인) 功虧一궤(竹밑에 貴; 삼태기궤)"라는 書經 旅獒編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홉길 산을 쌓아 올리다가 한 삼태기 흙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모두 허사가 된다." 는 뜻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와 교훈을 담고 있는 정자이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면서도 관리가 소홀하여 퇴락하여 가고 있음이 안스럽다.

좀 더 올라가면 노강서원 가까이에 淸風亭터가 있다. 梅月堂 金時習선생이 은거하면서 지었던 정자가 빈 터만 남아 있는 것이다. 節義의 선비 서계선생이 매월당을 숭모하면서 거닐었던 淸節이 스며배인 곳이어서 서울 노량진에 있던 노강서원을 복원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단다.


서계선생의 아드님이신 定齋 朴泰輔선생(1654~1689)을 모신 鷺江書院은 노강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원래 선생이 유배길에 서거하신 노량진에 세웠었는데 소실된 것을 후손들이 복원하면서 1969년에 선생의 世居地인 이곳으로 옮겼단다. 간소한 신축건물이면서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선생의 충절과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았던 賜額書院임이 감안되었을 것이라 했다.

박태보선생 역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출세가도를 걸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 서계선생처럼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던 선생은 張禧嬪에 빠져 仁顯王后를 내치려는(己巳換局) 숙종에게 목숨을 걸고 충간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가혹한 고문 끝에 겨우 참형을 면하고 원지에 부처되던 중에 겨우 노량진을 건너 장독으로 서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후에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정권이 바뀌자(甲戌換局) 충신을 처벌한 것을 후회하고 사면복권하였으나 선생은 이미 고인이 되신 후였다. 백성들이 선생의 충절을 얼마나 숭모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을 얼마나 애석해 했던지 個人傳記小說이란 찾아보기 어렵던 그 시절에 '仁顯王后傳'과 함께 '朴泰輔傳'이 나와 후세까지 전해지면서 널리 읽혔다고 하니 西溪, 定齋 부자분의 지조와 절의는 만고의 사표가 될 것이다.

친절한 안내와 과분한 후의를 베풀어 주신 서계종택 여러분과 이를 주선하신 임원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

                                                    2007 . 7. 21     觀 齋    朴 完 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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