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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신기전 발사 시연회 행주대첩 기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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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3-03-11 09:24 조회5,390회 댓글0건

본문

.선조23년 1593년 2월 12일  양력 3월 14일 에 있었던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을 기리는
제 420주년 행주대첩 기념제 및 신기전 발사 시연회


신기전 발사 시연회

일시:   2013년 3월 14일 11시 30분
장소:   행주산성 시정연구원 광장



교통편

철도: 경의선 능곡역 하차
전철: 3호선 화정역 하차
           (마을 버스 011 012  이용  행주산성입구 하차)

버스: 시내버스 85-1(고양동-행주산성-공항동  행주산성입구 하차)
        좌석버스.108.  921.  870.  873
                  (행주산성 입구하차 5~10분 도보)

문의처:  행주산성 관리사업소





대신기전

□ 1448년 개발된 세계 최초 2단형 로켓이자 세계최대의 종이약통 로켓화기이며, 세계적인 과학기술문화유산인 ‘대신기전(大神機箭)’의 연구개발 책임자가 당시 39세의 과학기술자였다는 추정이 나와 흥미를 끈다.

□ 우리나라의 전통로켓인 신기전을 연구해 온 한국항공우주연구원(원장 김승조)의 채연석 박사는 신기전의 전신인 주화(走火)와 신기전(神機箭)이 본격적으로 개발돼 사용된 시기인 세종 27년(1445년)부터 문종 1년(1451년) 사이의 조선왕조실록기록을 분석, 전통 로켓 무기인 ‘대신기전’의 연구개발 책임자는 조선 세종 27년부터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낸 과학기술자 박강(朴薑 : 1406~1460)이라고 14일 소개했다.

□ 채 박사에 따르면, 박강은 세종 27년(1445년) 3월 39세의 나이에 군기감정이 되어 2년 3개월 동안 업무를 수행하면서 최무선 때부터 사용해오던 주화를 개량, 소발화라는 폭탄을 부착하고 200m를 비행할 수 있는 ‘중주화’와 대형폭탄을 탑재해 500m 이상을 비행할 수 있는 초대형 로켓화기인 ‘대주화’ 등을 연구개발 했다.

○ 박강이 개발한 중주화와 대주화를 비롯한 주화는 세종 29년 가을부터 12월초까지 3~4달 사이에 여진족을 격퇴시키기 위해 평안도와 함길도의 4군 6진 지역에 모두 24,930개가 배치된다. 그리고 이중 9,000개는 평안도 현지에서 박강이 제조한다.

○ 박강이 재직했던 ‘군기감’은 화약 무기를 연구 개발하고 생산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국방과학연구소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관이다.

○ 당시 박강이 개발한 ‘중주화‘와 ‘대주화’는 세종 30년(1448년) 6월, 총통등록(銃筒謄錄)이 발간되면서 이름이 ‘중신기전’과 ‘대신기전’, ‘산화신기전’으로 바뀌고, 그 규격은 1474년 편찬된 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기록돼 있다.

□ 채연석 박사는 우리의 전통 로켓인 신기전에 애착을 갖고 지난 40여 년간 지속적으로 연구를 진행해 원형 복원에 성공했으며, 영화 ‘신기전’의 자문도 담당했다. 채 박사는 우리민족의 과학기술재능을 가장 보여주는 세계적인 과학기술문화유산인 신기전의 연구개발 책임자를 찾아내는 연구에 이어 앞으로 신기전의 제작 전통을 이어가는 과학문화축제의 개최, 신기전 관련된 설계 자료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 개발자 박강의 영정제작 및 관련 유물 찾기 등도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참고자료>

1. 박강이 대신기전 개발 책임자인 근거

박강은 조선 초에 좌의정을 지낸 박은(朴訔)의 둘째 아들로 1406년 출생하였다. 시호는 세양(世襄)이다. 실록에는 성품이 정교하고 기술과 재능이 많았으며, 젊었을 때 호협하고 얼굴 가꾸기를 잘하여 명기(名技)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였다. 군기감정 이후 1449년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웠다.

○ 박강은 세종 29년(1447년) 12월 평안도에 파견 나가 주화 9,000개를 제조하는데, 로켓화기는 구조와 제작방법이 복잡해서 로켓 전문기술자이어야 제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 29년 11월 22일, 주화는 말에서 달리며 혼자서 발사할 수 있고, 비행할 때 나오는 화염과 소리 때문에 적이 스스로 항복하고 겁에 질리게 한다는 장점을 열거하면서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여진족을 퇴치하는데 주화가 효과적일 것이라 하여 3차례에 걸쳐서 대량인 11,390개의 주화를 보내면서, 더 필요한 양을 요청하라고 지시한다. 세종 29년 12월 2일 평안도와 함길도에서 요청한 주화의 수효가 너무 많았는지, 박강을 평안도에 임시로 파견 보내 한양에서 보내온 재료를 이용하여 중주화 2,000개, 소주화 7,000개를 규격과 제조방식대로 제조한다. 그리고 함길도에는 박강과 함께 군기감에서 같이 일했던 원익수(元益壽)를 감련관으로 보내 중주화 1,040개, 소주화 3,500개를 현지에서 제작한다. 군기감에서 파직당한 6개월 후에 군기감 소속이 아니면서도 박강이 현지에서 중주화와 소주화를 제조하는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군기감에서 파직되기 전까지 2년 3개월간 근무할 때 ‘주화’의 개량 및 연구 개발을 주도하여서 본인이 직접 주화를 제작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가 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시험을 해보니 제작방법과 구조가 복잡해서 본인이 직접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잘 제작할 수도, 잘 제작하였는지를 감독할 수도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신기전의 전신인 주화가 본격적으로 사용 되는 세종 29년(1447년) 11월 직전에 대주화의 연구 개발기간으로 추정할 수 있는 2년 3개월간(세종 27년 3월부터 29년 6월까지) 세종시대의 화약무기를 연구개발 및 제작을 담당해온 군기감의 최고 책임자인 군기감정(軍器監正)이었다.

고려때 최무선에 의해 개발되어 몇 개씩 사용되는 기록이 보이던 ‘주화’가 세종 29년 가을에 이르러 갑자기 11,390개(소주화 6,500개, 중주화 4,800개, 대주화 90개)의 대량으로 제작하여 북방으로 보낸 기록이 나타나므로 이 이전에 충분한 개발기간이 필요하다. 실제로 대신기전을 복원하여 발사시험 해본 결과 많은 시험이 필요하였고 대신기전의 개발에는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 재주와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계 최초의 2단 로켓이며 세계 최대의 종이약통 로켓화기인 대주화는 무게가 4.5~5kg의 무게이다. 소발화가 달린 중주화의 무게는 200g, 소주화의 무게는 100g 정도이다. 따라서 대주화는 중주화보다도 23~25배 더 무거운 대형 로켓화기이며 이렇게 큰 로켓의 연구개발에는 과학기술분야에 창의력과 재주를 갖춘 뛰어난 과학기술자가 필요하다. 세종은 27년(1445년) 3월 30일, 그 동안의 화약무기 개발의 성과를 논의하면서 당시에 군기감에 근무하던 화약무기기술자로는 더 이상 획기적인 화약무기를 개발하기 힘드니 창의력과 재주가 뛰어난 새로운 인물로 박강을 추천 받아 군기감 책임자로 임명한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박강은 성품이 정교(精巧)하고 기능(技能)이 많아서 처음에 벼슬을 하면서부터 군기감을 맡아 잘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박강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새로운 로켓화기인 중주화와 대형 로켓화기인 대주화를 개발할 수 있는 재능을 갖춘 과학기술자로 추정된다.

○ 박강은 군기감에 판사로 있다가 파직 당했는데도 그 이후 계속 승진하는 것은 군기감에 근무할 때 새로운 주화를 개발 한 공로 때문이다.

박강은 군기감에 책임자로 있을 때 기술자가 죄를 짓고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를 판결하는 과정에서 불명예스럽게도 세종 29년 6월 2일 파직 당했다. 그러나 세종 31년 2월에는 공조참의로, 문종 원년(1450년) 8월에 황해도 도절제사로 그리고 5개월 뒤에는 황해도 도관찰사겸 병마도절제사로 계속해서 승진하는 점도 4군 6진에서 성공적으로 여진족을 무찌르는데 사용된 주요 신무기인 주화 종류를 군기감에서 성공적으로 개발한 공로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박강과 함께 군기감에서 같이 파직 당했던 원익수도 문종 1년 5월경 군기감정으로 다시 복귀한다.

위와 같은 점을 종합해 볼 때 박강을 주화를 개량하여 만든 중주화(후에 중신기전으로 이름이 바뀜) 및 대주화(후에 대신기전, 산화신기전으로 이름이 바뀜)의 개발 책임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 채연석 박사 신기전 연구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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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11월 역사학회에서 ‘주화와 신기전 연구’-한국 초기(1377~1600)로케트에 대하여 -를 발표

- 1978년 11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행주산성 유물기념관에 화차와 신기 전 복원 전시’

- 198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34회 국제우주대회(IAF)에서 ‘A Study of Early Korean Rockets(1377~1600)'발표

- 1993년 4월 대전 엑스포에서 화차와 중, 소신기전 복원 첫 발사시험,

- 2003~2008, 영화 ‘신기전’ 제작자문

- 2008년 9월 신기전 복원 발사시험, 영화 ‘신기전’ 개봉(46회 대종상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수상)

- 2009년 10월 대전에서 열린 국제우주대회(IAC)에서 ‘The History of Korean Rockets(1377~2009) - From Juwha to KSLV-1’ 발표.(산화신기전이 세계의 최초 2단 로켓’임 발표)

- 2010년 11월 ‘신기전의 소발화 폭발’, ‘산화신기전 발사시험(주화 2단 분리 성공)

3. 관련 사진

- 박강과 관련된 유품은 박강의 수결(사인)이 현재까지는 유일하다. 이 수결은 1456년 11월 14일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왕세자와 공신들이 모여 작성한 회맹문인 ‘오공신회맹문’에 있는 박강의 수결이다.

- 산화신기전에서 2단 로켓격인 지화가 분리되는 순간(2009년 11월 발사시험에서)

- 이륙하는 대신기전의 발사모습. 길이 5.5m 무게 3kg의 초대형 로켓화기인 대신기전과 산화신기전(2010년 5월 21일 고흥 비행센터 활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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