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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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함께 춤을
세종 11권, 3년(1421년) 1월 1일(갑자) 1번째기사 풍양 이궁에서 설을 축하하다
낙천정에서 원기를 회복한 태종이 다시 풍양궁으로 돌아왔다.
가끔 앞산과 뒷산에 사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풍양궁에 칩거했다.
설날이 돌아왔다. 대비를 먼저 보내고 처음 맞는 정월 초하루였다.
"종친의 여러 군(君)과 2품관 이하는 하례 반열에 참예하지 말라."번거롭게 하지 말라며
태종이 엄명했지만 우르르 몰려왔다.
세종이 흰옷에 검은 사모를 쓰고 밖에서 헌수(獻壽)했다.
종친과 훈신 그리고 재상 등 58인은 모두 길복(吉服)으로 시연(侍宴)했다.
각도에서는 표(表)와 전(箋)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하례가 있은 후, 연회가 펼쳐졌다.
연회에서 비로소 풍악이 연주되었다. 국장 이후 처음이다.
세종은 머리에 꽃을 꽂지 않고 앞의 상에 꽂았다.
상보(床巾)는 검은 것을 사용했고 기물은 흑칠(黑漆)을 한 것을 썼다.
술이 돌아갈 적에 태종이 눈물을 씻으며 대소신료들에게 말했다."주상이 나에게 헌수할 적에는 내전으로 들어와서 헌수하더니 오늘은 그런 일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태종이 눈물을 흘렸다.
세종이 상복을 입고 마당에 거적을 깔고 헌수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태종이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좌의정 박은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침울한 상왕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다.
여러 사람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세종이 부왕을 부축하여 일어섰다."온 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나를 이렇듯 사랑하고 있으니
무슨 말을 또 하랴.
나는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다."세종의 부축을 받고 일어 선 태종이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대비를 잃은 슬픔을 잊고 온갖 시름을 놓은 듯했다.
세종 3권, 1년(1419) 2월 21일(병신) 3번째기사 상왕이 동교에서 매사냥을 하다. 대산 아래 지은 궁의 낙성식을 하다
상왕은 노상왕과 더불어 동쪽 교외에 나아가 매사냥을 하는데,
임금도 따라가 드디어 대산(臺山)의 신정(新亭)에서 잔치하고 저물녘에 돌아왔다.
대산은 살곶이[箭串] 벌의 동쪽에 있어 한강에 다다르고, 형상이 시루를 엎어 놓은 듯하여, 혹은 증산(甑山)이라고도 한다.
상왕은 지난 겨울부터 그 아래에 궁을 건축하고, 그 위에 정자를 짓게 하여,
이제야 낙성식을 하므로,
박은에게 명하여 이름을 짓게 하니,
박은은 낙천(樂天)으로 명명할 것을 주청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현재 낙천정(樂天亭)은 강변북로에 면한 자양동 낙천3길 현대아파트 102동 우측에 있다.
낙천정은 원래 자양동에서 동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거슬러 올라간 곳 언덕 위에 있었다. 이 곳 언덕은 모양이 높고 둥그스름한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하여
시리미산(甑山)·대산(臺山)이라 하였으며, 후에 발산(鉢山)이라고도 불렀다.
대산은 표고 약 43m 정도 밖에 안 되는 낮은 언덕이지만,
한강이 발 아래 감돌아 흐르고 강 속에 처져 섬을 이루고 있는 잠실동·신천동과 그 건너 남한산성이 병풍처럼 벌려 섰고,
남쪽에 청계산·관악산, 그리고 서쪽에는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경승지였다.
조선 태종은 즉위 18년(1418)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후,
그 해 9월 이 곳 대산 아래 서북쪽 모퉁이에 이궁(離宮)을,
산 위에 정자를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세종 원년(1419) 2월 낙성하였는데,
'어사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좌의정 朴訔은 정자의 이름을 ≪주역≫ 계사편의
"樂天知命故不憂(낙천지명고불우, 천명을 알아 즐기노니 근심하지 않는다)"에서 뜻을 따서 '樂天(낙천)'이라 지었고,
의정부참찬 변계량(卞季良)은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지었으며,
한성부윤 권홍(權弘)은 이를 써서 같은 해 9월 4일 판각하여 정자에 달았다.
변계량은 <낙천정기>에서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큰 강과 못 뚝이 서로 얽히고 출렁이며,
연이은 봉우리와 겹쳐진 멧부리가 차례로 나타나고,
층층이 나온 것이 언덕을 둘러 모여들어 많은 별들이 북두칠성을 둘러싼 것 같기도 하니 과연 하늘이 만든 승지(勝地)다."라고 칭송하였다.
태종은 낙천정 뿐 아니라 서울 동쪽에 풍양궁(豊壤宮)과
서쪽에 연희궁(衍禧宮)을 지어 번갈아 거처하며 만년을 즐겼으나,
이 곳에 더 많이 거둥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세종 원년 이 곳에서 세종과 함께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삼판선(三板船)을 꾸미게 하였고,
이 해 8월 체찰사(體察使) 이종무(李從茂) 등이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남해를 거쳐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평정하고 돌아오니,
그들을 위하여 환영연을 성대히 베풀고 상을 주었다.
세종 2년 정월부터 상왕 태종과 대비 원경왕후는 이 곳에 옮겨 거처하게 되므로,
왕은 수시로 나가 양전(兩殿)에 문안한 후 유숙하고 돌아옴은 물론,
왕비 또한 때때로 낙천정에 나가 문안드렸다고 한다.
세종 3년 5월에는 오위진(五衛陣)이라는 군사훈련을 사열한 일도 있으나,
세종 4년(1422) 5월 태종이 승하한 후 왕은 이 정자를
그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사급(賜給)하였고,
공주는 이를 작은 아들인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
성종 3년(1472)에는 양잠을 장려하기 위한 잠실(蠶室)로 이용된 듯하며,
인조 원년(1623)에는 채전(菜田)으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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