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보따리(17) 逆葬에는 반역자?, 倒葬에는 정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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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인터넷에서 갖어온 글입니다> 풍수보따리(17) 逆葬에는 반역자?, 倒葬에는 정승? |
| | 풍수보따리 |
| / | 2012.11.30 17:05 |
| 逆葬에는 반역자?, 倒葬에는 정승? | |||||||||||||||
| 김규순의 풍수보따리<17> 역장의 본뜻은 머리와 다리의 방향 바뀐 것 지금은 5년마다 역성혁명... 역장해서 대통령 만들면 어떠한가 | |||||||||||||||
| 뼈대가 있는 집안이고 선산을 갖고 있는 집안이라면 으레이 들어본 말이 역장이다. 역장이란 조상의 산소 위에 후손의 무덤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이는 본래의 뜻이 왜곡 된 것이다. 역장의 본뜻은 머리와 다리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일반적으로 머리는 용맥이 내려온 방향으로 두는데 반해 역장은 머리를 계곡으로 두는 경우를 말한다. 명문가에는 있고, 비루한 가문에는 없는 것이 역장이다. 조선초기와 중기에는 역장이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었다. 거의 전국적으로 사대부들의 거부감 없이 역장을 사용했다. 때로는 역장이라 하지 않고 도장(倒葬)이라고도 표현하는데 동일한 의미이다. 역장(도장)을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역장을 해야 역모가 나타나지 않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 실례를 보면, 동래정씨의 동래군파 정난종의 묘가 맨 아래에 있고 그 위에 장남 정광보 그 위에 차남 정광필 위에 광필의 장남 정복겸 그 위에 복겸의 아들 정유신의 묘가 만들어져 있다. 역장의 표본이다. 3대 연속해서 대제학을 배출한 연안이씨의 월사 이정구-이명한(장남)-이일상(장손)의 묘도 역장으로 조성되어 있다.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의 묘 아래로 고조모 양천허씨 묘와 증조부의 묘가 있다. 그 외에도 현장에서 발견한 역장이 수 백 군데가 되지만 명문가의 역장을 살펴보면, 창녕성씨 우계 성혼의 묘 아래에 아버지 성수침 묘 덕수이씨 이원수와 신사임당 묘위에 율곡 이이의 묘 대구서씨 약봉 서성의 부모 묘 아래에 조부모 묘 광산김씨 김반의 묘위에 아들 김익겸의 묘 광주이씨 토정 이지함 묘위에 아들의 묘 장수황씨 황희정승 위에 증손의 묘. 청주한씨 한명회의 묘위에 부인의 묘 의령남씨 남재의 아들 남경문의 묘위에 후손들의 묘 반남박씨 시조 박응주 묘위에 손자 박윤무의 묘 한양조씨 정암 조광조 묘 아래에 부모와 조부모의 산소 경주김씨 김정희의 윗대인 상촌 김자수의 묘위에 아들의 묘 해평윤씨 윤보선 대통령의 묘 아래로 고조부 윤득실의 묘, 부모 묘, 증조모 묘
이렇듯 명문가에서는 역장을 꺼리지 않고 사용하였다. 같은 역장을 두고 비루한 가문에서는 역모자가 나타난다고 역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명문가에서는 역장을 하지 않으면 뛰어난 인물이 나와서 왕조를 바꾼다고 했다. 특히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성리학의 대가이며 예학의 거두로 추앙되는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도 역장을 한 것을 보면, 반역자가 나온다는 말은 허구이다. 역장이 나타난 시대적 흐름 역장을 금기시 한 것은 시대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이다. 문중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종손을 중심으로 종법제가 실시되는 시기이다. 나라가 백성을 보호해 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문중의 결속력이 강화 된 것이다. 조선초중기에는 장가를 들었다. 그래서 처가에서 살림살이를 하였고, 처가의 재산을 상속 받아서 부자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위가 처가의 문중 선산에 무덤을 사용한 경우가 발견되는 것이 그러한 연유이다. 조선 후기에는 혈족 중심으로 단결이 강화되면서 혈족 외에는 배타성이 강해진다. 가문의 재산이 다른 성씨로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위를 배척하게 되었고, 타성이 선산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문중에도 적용이 되어 점점 권위주의화 되고 경직화 되었다. 먼저 이러한 상황은 조선 성리학과 종법제의 말기적 폐단이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역장이 사용된 진정한 이유는 위이건 아래이건 좋은 자리에 부모님을 모시고 그 다음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효의 개념이기도 하다. 말기적 폐단이 나타나서 사고가 경직되자, 위는 조상의 자리, 아래는 아래 사람들의 자리라는 등식을 만들었다. 간혹 조상이 아랫자리가 좋다고 사용해 버리면 후손들은 그산에 아무리 좋은 자리가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조상이 죽으면 후손들을 위해서 좋은 자리를 뇌두고 높은 자리에 묻혀야 되는 하극상도 발생하곤 했다. 무식의 소치이다. 정말 조상을 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풍수가 아니다. 풍수는 조상을 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 둘째 이유는 문중의 선산을 종손이나 장손들이 독차지하려는 의도이다. 종손이나 장손이 잘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이유가 그런 탐욕에 빠져 진정한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덤이 전부는 아니다. 조상을 잘 모셨어도 자기가 노력을 해야 한다. 맹신적인 무덤 신앙으로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지금도 지방에 가면 조상의 무덤 옆이라서 못쓰고, 조상의 무덤 위라서 못 쓰고, 조상의 무덤이 가까워서 못쓰게 하는 문중이 있다. 남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격이라 하겠다. 이런 가문에서는 큰 인물이 나올 턱이 없다. 더 좋은 산을 구해서 좋은 명당을 공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 빼앗기지 않으려는 심산이다. 혹시나 자기가 찾지 못한 명당을 다른 이가 사용할까 겁이 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산이 아니라 조상이 만들어준 산이라면 공동조상을 둔 후손들은 모두 동일한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손이나 문중 장손들만 차지한다. 이것이 종법제의 극단적 이기주의이다. 그러다가 문중의 선산이 경매로 넘어가거나 종손이 팔아버렸을 경우 다른 성씨가 좋은 자리에 묘지를 쓴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일까. 공원묘원이나 공동묘지에 가면 상하좌우로 온통 묘지이다. 그런 곳에서 역장을 따지지 않는다. 산송(山訟)과 암장(暗葬) 문중선산은 종손들이 주체가 되어 관리한다. 문중의 인구가 불어난 탓도 있고 선산을 사용함에 문란해진 면도 있을 것이다. 관리 규약을 만들지 않고 종손집단의 입맛대로 운영하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문중선산의 경직된 관리가 낳은 불협화음이 산송과 암장이다. 조상묘위에 좋은 자리가 비어 있고 아무도 쓸 수 없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타성이 점령(?)하는 경우에는 산송(山訟)으로 번진다. 392년을 끌어온 산송이 타결되었다고 신문(2008년)에 대서특필되었던 파평윤씨와 청송심씨와의 분쟁이었다. 윤관 장군묘 위에 청송심씨의 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영의정이었던 심지원(1593-1662)은 자기의 부모를 윤관장군의 묘역에 모시고 자기의 무덤도 부친묘 옆에 조성한 후 19기가 들어선다. 남원에서 명당으로 소문 난 황희정승의 조부 황균비의 묘 위아래로 묘를 조성한 인근 부락민과의 갈등으로 1905년까지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출처] 풍수보따리(17) 逆葬에는 반역자?, 倒葬에는 정승? (서울풍수연구소) |작성자 김규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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