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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의 출생지의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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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태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8-13 10:26 조회3,507회 댓글0건

본문

문정공의 출생지의 의문

문정공의 출생지에 대한 기록에 의문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새로히 출간되는 족보 세적편 118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반남선생가전

선생의 휘는 상충(尙衷)인데 자는 성부(誠夫)요 성은 박씨이다。박씨의 본적이 반남현(潘南縣)인 까닭에 세상에서 반남선생이라고 부른다。반남은 뒤에 나주(羅州)에 병합되었다。증조부인 의(宜)는 과거에 급제(及第)하였고、할아버지 윤무(允茂)는 진사(進士)로 양온령동정(良覓令同正)을 지냈으며、아버지 수(秀)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상호군(上護軍)으로 치사했다。

선생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二년 임신(一三三二)에 공암현(孔巖縣、현재의 서울 강서구)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학문을 널리 배워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곁들여 천체의 운행을 살펴 인간의 운수를점치는 성명학(星命學)에 대해서도 연구가 깊어 사리에 밝고기민하기가 보통 사람에 뛰어났다。장성한 뒤 한산이씨(韓山李氏) 문효공(文孝公) 곡(穀)의 따님에게 장가드시니、




반남선생가전에 보면 다음과 같이

선생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二년 임신(一三三二)에 공암현(孔巖縣、현재의 서울 강서구)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 의하면 ‘공암현’은

고려사 >卷五十六 志 卷第十 >地理 一 >양광도

本高句麗齊次巴衣縣, 新羅景德王, 改今名, 爲栗津郡領縣. 顯宗九年, 來屬. 忠宣王二年, 改爲陽川縣, 置令




아래 '세종 지리지'에 공암현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지 / 경기 / 부평 도호부 / 양천현

양천현(陽川縣)

영(令) 1인.

본래 고구려의 제차파의현(齊次巴衣縣)인데, 신라가 공암(孔岩)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5028) 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무오5029) 수주(樹州)5030) 임내(任內)에 붙이었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양천현으로 고쳐서 영(令)을 두었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기 11리, 서쪽으로 김포(金浦)에 이르기 11리, 남쪽으로 금천(衿川)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한강[大江]에 이르기 1리이다.

호수가 2백 22호, 인구가 5백 단(單) 9명이요, 군정(軍丁)은 선군(船軍)이 31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공(孔)·변(邊)·허(許)·최(崔)요, 인물(人物)은 첨의중찬(僉議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이다.【충렬왕(忠烈王) 때 사람인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 되며, 간전(墾田)이 1천 8백 77결(結)이다.【논이 3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조·기장·피·콩·수수·팥·녹두·메밀·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이며, 토산(土産)은 현(縣) 서쪽 굴포(堀浦)에서 매년 겨울 몹시 추울 때에 뱅어[白魚]가 나고,【심히 아름다와서 맨처음에 나라에 바친다. 】양화도(楊花渡) 아래에서 주로 웅어[葦魚]·숭어[水魚]·면어(綿魚)가 난다.

주산 석성(主山石城)이 현(縣) 북쪽에 있고,【둘레가 6백 54보인데, 북쪽으로 한강[大江]에 임하고, 성 가운데에 샘이 없다. 】역(驛)이 1이니, 남산(南山)이다. 사곶포(寺串浦)【현(縣) 남쪽에 있는데, 옛날 군사의 목장(牧場)이며, 금천(衿川) 사외포(沙外浦) 목장과 서로 연한다. 】공암진(孔岩津)【현(縣) 북쪽 2리에 있는데, 사사 나룻배가 있다. 동쪽에 돌이 우뚝하게 서 있는데,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봉화가 1곳이니, 개화산(開花山)으로, 현(縣) 서쪽에 있다.【동쪽으로 경성(京城) 남산(南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김포(金浦) 주산(主山)에 응한다. 】작은 섬이 현(縣) 바로 북쪽 강 가운데에 있으니, 새섬[新島]이라고 한다.【지금 선공감(繕工監)의 풀갓[草薍場]이 되었다. 】

[註 5028]율진군(栗津郡) : 과천.

[註 5029]무오 : 9년.

[註 5030]수주(樹州) : 부평.

충선왕(忠宣王) 2년 : 1310






 

반남선생가전의 기록에 의하면

반남선생의 출생은 공암현 현재의 서울 강서구 양천이다.

그런데 이에 상충(相衝)하는 기록이 있으니 있으니




다음은 2세 급제공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다 (세적편 92쪽)




及第公 諱 宜 事蹟

諱宜墓失傳 蜂峴十里 孔巖縣馬山里 有一大古塚

傳言朴氏山 而土着徐哥 葬其側甚多 又潘南

급제공 휘 의 사적

峰峴에서 十里되는  공암현(孔岩縣) 마산리(馬山里)에 커다란 옛 무덤 하나가있는데 박씨의 산소라고 전해져 오긴 하지만 토박이 서가(徐哥)가 그 곁에 만든 묘가 매우 많다。또 반남리(潘南里) 정가(鄭家)의 대숲 속에 옛무덤이 있는데 또한 어떤 이는 박씨

묘라고 한다。영조 경진년에 十七대 손 도원(道源)이 두 곳을 다시 조사해 보았으나 모두 증거가 없었다。박문찬(朴文燦)이 《장연족보(張連族譜)》를 만들었는데 그곳에 『공은 송도의 성등동(星燈洞)에 살았는데 묘는 풍덕(豊德)에 있다』고하였고 또 『관직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추밀사(樞密使)며 배위(配位) 윤씨는 용기순위사 대호군(龍騎巡衛司大護軍) 윤보(允輔)의 딸이다』고 했으나 다른 족보에는 실려 있지 않으니이상한 일이다。|전하는 말에 묘는 반남서원(潘南書院) 북쪽、음판촌(陰坂村) 뒤에 있다고 하였지만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또 전하는 말에 묘가 마산(馬山)에 있다고 하나 마산이 어느 군인지 애초에 몰랐다。十三세손 세채(世采)가 일찍이 파주(坡州)에 살 때 비로소 고을 경내에 마산이 있다는 말을듣고 또 박씨 묘가 이곳에 있다는 말도 전해져 왔기에 해를

넘기며 조사하다가 그만두었다。

뒤에 나주(羅州) 봉현(蜂峴)에서 十리 되는 곳에 마산리(馬山里)라는 곳이 있고 이 마을가운데 바위 하나가 있는데 바위에 구멍이 많기 때문에 공암(孔巖)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그리고 반남선생(潘南先生) 행장을 살펴보면 선생은 공암현 마산리에서 태어났다고하였으니 이것이 그 땅인가。

공암(孔岩)의 아래는 여조(麗朝)의 고총(古塚)이 하나 있는데 전해오는 말에는 박우(朴禹)의 무덤이라 하고 또한 마산리 안에는 마을 하나가 있는데 박가촌(朴哥村)이라고 하였으니、대개 우(禹)와 의(宜)는글자의 소리가 와전되기 쉽고 또한 지명과 촌명은 서로 부합하니 이것이 혹시 증거가 될까。다만 여조(麗朝)의 장지에는반드시 피장자(被葬者)가 누구라는 묘지(墓誌)가 있기 마련

이어서 도원(道源)이 안찰사로 왔을 때 땅을 깊이 파 보았으나 끝내 증거가 없었으니 어찌 의심이 나지 않겠는가。어떤이는、어느 때인가 호장공의 묘소를 개축할 때 묻힌 묘지(墓誌)를 찾으려고 영역(塋域)을 널리 파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하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역사적인 사실로 볼때는 공암현은 현재 서울 양천이고

급제공 할아버지 사적에는 나주 반남면 봉현에서 10리 되는 공암현 마산리로 기록되어있다.

서울 양천소재의 공암현에는 ‘마산리’라는 곳의 지명에 대한 기록이 없고 마산리의 소재를 알수가 없으며

또 공암현 자체가 1310년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년에 양천현으로 개명이 되었으며

양천현으로 개명은 문정공이 1332년 출생 22년전의 일이다. 현재의 양천에서 출생하셨다면 양천현 마산리라고 해야 옳은일이 아닌가 의심이 생긴다.



그러면 반남의 공암현 마산리는 어떠한가

반남에는 공암현이 없다.

그러나 ‘마산’이란 지명이 화정리로 개명된곳은 있다.(나주시 왕곡면 화정리 마산 마을)

문정공의 출생지가

기록상으로 볼때는

서울의 강서구 양천인가

나주(羅州) 봉현(蜂峴)에서 十리 되는 곳에 마산리(馬山里)인가






潘南先生家傳 <원문>

先生諱尙衷 字誠夫 姓朴氏 朴氏本籍潘南縣 故世

稱潘南先生 潘南後幷於羅州 曾大父宜 及第大父

允茂 進士良覓令同正 父秀密直副使上護軍 致仕

先生以高麗忠惠王二年壬申 生於孔巖縣馬山里

博學通經史 善屬文 傍究星命 精敏絶人 旣長娶韓

山李氏文孝公穀之女 文靖公穡之妹也 文靖早承庭

訓 後遊中國

위 반남선생 가전의 원문에는 공암현 마산리라고 되어 있으며

원문의 해석문에서는 공암현을 ‘현재의 서울 강서구’라고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주었다




潘南先生家傳 <해석문>
선생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二년 임신(一三三二)에 공암현(孔巖縣、현재의 서울 강서구) 마산리(馬山里)에서 태어났다



반남선생 출생지가  

공암현 마산리로

        서울 강서구 양천인지

        반남면 봉현 10리 되는곳 마산리인지


확실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는데 


세적편에 공암을
현재의 서울 강서라고 기록하는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원문에 있는 ‘공암현 마산리’ 만 기록하고 해석문 주석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서울 강서’라는 기록은 보류하였다가 후에  종중에 모두의 의견이 서울의 강서라고 나올때 기록하는것이 옳은 일이 안닌가


공암현이 
역사적으로도 반남선생이 태여나시기  22년전에 양천현으로 개명이 되었고
양천에서는 마산리가 발견되지 않았고

우리 종중의 기록인 
'급제공 휘 宜 사적'을  전혀 무시하고 역사기록만 따르는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면

차후 좀더 많은 연구후에  공암현 마산리가 
'서울 강서 양천'이다  혹은
'반남면   마산리'다 라는 
결론을 내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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