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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조왕사실(新羅始祖王事實(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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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창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6-27 11:49 조회4,5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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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신라시조왕사실(新羅始祖王事實(2)

신라시조왕사실(新羅始祖王事實)

2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종인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에서 어느 종인의 애종심에서 거론하신 문제가 시정된 것은 다행이라는 하겠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

중국인가, 한국인가?> 라는 질문의 답에 해당된다고 보는 신라시조왕사실(新羅始祖王事實) 녹색 부분을 삭제한 것은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아래 사진 참조)

 

세적편은 이렇게 한가지씩이라도 시정해나가는 방법으로 2-3년 간을 교정하고 엄선해서 발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윗대의 상계는 직계의 가까운 선조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종인 들이 관심도 없는 까닭에 잘못을 교정하는 일이 좀 쉬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선조 님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지나치다 할 정도의 관심으로 잘못을 시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규명하는 일은 가까울수록 쉽고 멀수록 어려운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은 그 반대로 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할 것입니다.
현재는 조선시대가 아닙니다.
선조가 위대하다하여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며 그 덕분에 부자가 되거나 높은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조상을 파는 사람들을 비웃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는 사실대로만 기록하면 될 것입니다.

신라시조왕사실(新羅始祖王事實)이라는 표현을
신라시조왕유래(新羅始祖王由來)나
신라시조왕전설(新羅始祖王傳說)이라고
[지금의 경상좌도(慶尙左道) 경주(慶州)이다. 를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慶州)이다. 라고 검토도 해보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한가지 유감은 세적편에 대한 종인 들의 관심이 이렇게 없음에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2012.6.27
                       박 창 서

                  12. 신라시조왕 사실번호 1102 |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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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다른 표현으로 하면 어떨까?

연록색=잘모르는 표현

  

신라시조왕사실(新羅始祖王事實
신라시조왕유래(新羅始祖王由來)

신라시조왕전설(新羅 始祖王 傳說)

 


신라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이다.

[지금의 경상좌도(慶尙左道) 경주부(慶州府)이다.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이다. 

살펴보건대 한강(漢江)의 북쪽은 본래 삼조선(三朝鮮)의 땅으로서 뒤에 사군(四郡)이 되었다가 이부(二府)가 되었고 뒤에 고구려가 되었다. 한강의 남쪽은 본래 삼한(三韓)의 땅인데, 한(漢) 혜제(惠帝) 때 조선(朝鮮)의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기어 남쪽으로 내려와서 도읍을 세웠으니 지금의 익산(益山)으로 국호를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그 때 秦에서 도망 온 사람들이 마한으로 들어오니 동쪽 지방을 베어주어 국호를 진한(辰韓)이라고 했는데, 백 칠년이나 되어도 항상 마한인을 임금으로 삼고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군장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가 비로소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신라이다.[땅은 동쪽 변방에서 사향(巳向)이니 지금은 조선국이다] 이보다 먼저 조선의 유민이 동해 가에 살면서 육촌(六村)[알천양산(閼川楊山) 돌산고허(突山高墟) 문산대수(茂山大樹) 자산진지(觜山珍支) 금산가리(金山加利) 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를 이루었는데 각기 촌장[알평(謁平) 소벌(蘇伐) 구례(俱禮) 지백호(知伯虎) 지타(祗沱) 호진(虎珍)]이 있었다. 한(漢)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 임자년 3월 1일에 이알평(李謁平)[처음으로 진한의 표암봉(瓢巖峯) 아래로 내려와 촌장이 되었으니 이가 경주이씨(慶州李氏)의 시조이다]이 육부의 촌장과 더불어 알천(閼川)[지금의 경주]에 모여서 의론하되 “위에 군장이 없으니 어찌 유덕한 사람을 구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세워서 교화를 펴지 않으리오” 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삼일 만에 오색구름이 양산(楊山) 기슭 나정(蘿井)[지금의 경주부 남쪽으로 7리 되는 곳, 지금도 돌우물에는 덮개가 있음]에 내려오고 숲 사이에는 전광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에 뻗쳤는데 선인(仙人)[혹은 백마로도 되어 있음]이 꿇어 앉아 절하는 형상이었다.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가서 보니 박[瓠]만한 큰 알[어떤 이는 박[瓠]을 선도(仙桃)라고도 하였는데 산성모(山聖母)가 탄생한 일이 아래에 나타나고 또 지명에도 나타남]이 있기에 쪼개어 보니 단정하고 아름다운 어린애가 나왔다. 그리하여 東川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여 육부 사람들은 신이라 여기고 거두어 길렀는데 성을 박(朴)[진한인은 호(瓠)를 박(朴)이라고 하니 큰 알이 호(瓠) 같기 때문에 드디어 성을 박(朴)이라고 했음]으로 하였다.

나이 일곱 살에 숙성해서 어른 같았으며 일찍이 꿈속에서 신인(神人)이 금으로 만들 자를 주었는데 그것으로 병자나 죽은 이를 재면 문득 일어나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년 4월 병진에 건국하여 왕이 되니 그 때 나이가 13세였다. 휘(諱)는 혁거세(赫居世)[진한인의 방언으로는 왕이라는 뜻이다. 어떤 이는 귀인을 부르는 말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혁거세는 혁연하게 왕위에 있다는 뜻이라고 하였음]인데 건국해서 호칭을 거서간(居西干)[진한인의 방언으로는 존장(尊長)의 칭호임]이라 하고 진한 땅[동남쪽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지리산과 접하며 북쪽 경계는 한강이니 고려에서는 동경(東京)이라고 일컬었음]에 도읍을 두고 국호는 서라벌(徐羅伐)[혹은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는데 김씨(金氏) 지증왕(智證王)이 덕업이 날로 새로워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을 취해서 신라라고 했음]이라고 하였다.  

한 선제 감로(甘露) 원년 무진에[이때 왕 나이는 17세] 알영부인(閼英夫人)[여러 역사서에는 알영(閼英)이라고 했는데 이제 세가(世家)를 살펴보니 씨(氏)로 삼았음]을 왕비로 봉하였다. 박[瓠]을 쪼개던 날 두 자룡(紫龍)이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부(府)에서 남쪽으로 5리 쯤 됨]에 나타났는데 그 오른쪽 옆구리로 어린 여자애를 낳으니 여자 아이의 용모가 아름답기에 노파가 기이하게 여겨서 기르고 그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그런데 왕비가 되어서 내조를 잘하니 사람들은 이성(二聖)이라고 일컬었다.[본래 왕이라고 일컫지 않았는데 최치원과 권근(權近)의 저서에서 왕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그에 따랐음] 왕이 나라를 통치하자 이웃인 왜와 낙랑(한이 사군을 설치할 때 만든 하나의 군명인데 지금의 평양부(平壤府)임)이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계묘년에 변한(弁韓)이 와서 항복하였다. 갑신년에는 고주몽(高朱蒙)이 부여(扶餘)에서 건국하니 지금의 성천부(成川府)로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고 계묘년에는 고온조(高溫祚)가 위례성(慰禮城)에 건국하니 지금의 직산현(稷山縣)인데 국호를 백제라 하였음]

왕은 재위한 지 61년 되던 때인 갑자 3월에 서거하니 오릉(五陵)에 장사지냈다.[왕이 서거하여 승천하시는데 여러 신하들이 붙들고 통곡하니 머리는 하늘로 올라갔는데 사지와 신체는 각각 아래 땅으로 떨어졌으므로 그것을 다섯 곳에 매장하고 오릉이라 일컬었다. 지금 부내(府內)에  있어 평지가 되었으나 한 곳만은 봉분이 조산(造山) 같고 비갈(碑碣)은 없다. 또 말하되 남해(南解) 유리(儒理) 파사(婆娑) 등 삼왕을 모두 시조의 원릉(園陵) 안에 매장했기 때문에 오릉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 지는 분명치 않음] 왕비가 서거하니[왕이 서거하신 7일 뒤]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지금은 부내(府內) 풍암사(楓岩寺) 북쪽에 있다. 한 곳에 장사 지내려하니 큰 뱀이 나타나서 금하였기에 각기 장사를 지내고 사릉이라고 일컬었음]

살펴보건대 《삼국승람(三國勝覽)》의 선도(仙桃) 성모(聖母)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서 이름을 파소(婆蘇)[혹은 파사소(婆娑蘇), 또는 사소(娑蘇)라고도 함]니 일찍이 신선술을 배워서 해동으로 유람 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혁거세가 그 성모의 소생이라고 전하기 때문에 중국인은 찬양하여[송(宋) 사신 왕양(王襄)의 〈제동해신성모문(祭東海神聖母文)〉] 선도성모(仙桃聖母)가 현인을 잉태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다. 경주의 서악(西嶽) 선도산(仙桃山)에는 옛날에 성모사(聖母祠)가 있었다고 한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학사 김부식이 송에 들어가 우신관(祐神館)에 참배하니 집 하나가 있는데 그 뒤에 여선(女仙)의 상이 있었다. 관반(館伴)인 왕보(王黼)가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들은 아는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옛날에 황제의 딸이 남편도 없이 잉태를 해서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바다를 건너 진한에 가서 아이를 낳아 해동의 시왕(始王)이 되게 하였다. 황제의 딸은 지선(地仙)의 우두머리가 되어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서사가(徐四佳)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도 ‘신라․고구려․백제 초기에 이런 제녀(帝女)의 일이 없었으나 다만 동명왕이 날 때에 유화(柳花)의 사적이 있었으니 아마 중국에서 오인하여 이런 궤이한 얘기를 한 듯하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유화는 하백의 딸이고 제왕의 딸은 아니며, 또한 부여에서 건국하였는데 여기서는 진한이라고 하였고 우협(優協)에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선도(仙桃)라고 하였으니, 중국인은 반드시 근거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였을 것인데 문득 오인했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미수(眉叟)의 《지승(地乘)》을 보면 낙랑에는 〈혁거세파소묘비명(赫居世婆蘇廟碑銘)〉이 있는데 “선도(仙桃)가 낳은 대호(大瓠)는 상서롭다”고 하였고 그 외 《승람(勝覽)》의 여러 설과 〈숭덕전비음기(崇德殿碑陰記)〉에도 또한 그러하니 이 제녀가 없었다고 해서는 안될 것이고 사가(四佳)의 설은 마땅히 다시 상고해야만 할 것이다]

 

주자(朱子)는 “인도(人道)로 낳은 것이 아닌 것을 어떤 이가 상서롭지 않다고 여기자 선유(先儒)가 자못 의심하였지만, 장자(張子)는 말하되 ‘천지의 시초에 진실로 먼저 인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진실로 화해서 태어난 것이 있었으리라’고 하였으니, 대개 천지의 기가 낳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가락전(駕洛傳)〉찬(贊)에는 “태고에 바다 모퉁이에서 인물이 나기 시작하여 최후로 요임금 때 비로소 단군이 나셨는데 한대에 와서 혁거세․주몽․알지․탐라의 고부량(高夫良)이 났으나 모두 인도(人道)는 아니고 화생(化生)한 것이다. 건무(建武)[한 광무제 연호 25-58년]에 육가야(六伽倻)의 왕이 태어난 것도 또한 그러하였다. 상고(上古)에 유웅씨(有熊氏) 부인은 큰 번개에 감응해서 영제(英帝) 헌훤씨(軒轅氏)를 낳았고 설(契)이 태어날 때도 간적(簡狄)이 제비가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잉태하였고 후직(后稷)이 태어날 때는 강원(姜嫄)이 거인의 족적을 밟고 잉태하였던 것이니, 옛날부터 생민(生民)의 선조는 그 출생이 모두 그러했던 것이다.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시에는 ‘계림은 하늘박[天瓠]을 박이라고 부르니 작은 나무 덩굴 뻗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라고 쓰여 있다”고 하였다.

명 태조 고황제(高皇帝)가 권근에게 신라에 관한 시를 지으라고 명하니 “그 옛날에 혁거세, 오봉(五鳳) 원년에 나라를 세웠네. 서로 전하여 기나긴 천년이 되었으니, 치우친 한 모퉁이 그저 보전했도다”라 하였다. 허미수(許眉叟)의 《신라세가략(新羅世家略)》에는 “혁거세․탈해․알지 등 뛰어난 현자가 서로 이어 세 성(姓)이 겸양하면서 왕 노릇을 바꿔했으니 이것은 하․은․주 때도 일찍이 없던 일이다. 유덕한 정치로써 건국한 지 천년에 인의(仁義)의 나라라고 불리워졌고 나라가 망할 때에도 오히려 유풍과 여교(餘敎)가 있었으니 처음과 끝을 모두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1) 건무(建武) : 한 광무제 연호, 25-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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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date.gif작성일 : 11-01-05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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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종원
icon_view.gif 조회 : 1,118  
경신보 세적편 첫머리에 보면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 사실(事實)>(바로 뒤의 <음기(陰記)> 포함)이란 글이 버티고 있다. 물론 반남박씨 최초의 인물로 기록에 남아있는 1세 호장공(휘 應珠)께서, 비록 그 선대 계보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이 분명하므로 대한민국 모든 박씨(朴氏)의 비조(鼻祖)로 인정되는 혁거세 시조왕에 관한 기록이 맨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반남박씨 15만 종인들 중에서 그 기록을 읽어본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반남박씨,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박씨의 비조인 혁거세의 어머니는 중국 제실(帝室)의 딸 사소(娑蘇)(또는 파소 婆蘇)"라는 것이다. (즉 사소(파소)가 바로 혁거세를 낳은 선도성모(仙桃聖母)라는 주장). 중국 황제의 딸인 사소가 "남편도 없이 잉태를 해서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바다를 건너 진한에 가서 아이를 낳아 해동의 시왕(始王)이 되게 하였"으니 이 시왕(始王)이 바로 박혁거세라는 내용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혁거세 시조왕의 탄생 신화를 철저하게 왜곡, 날조했다는 것이다. 사대(事大) 중화주의(中華主義)에 매몰되어 있었던 과거 이 땅의 유학자들이 분별 없이 받아들인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모화사상(慕華思想)의 극치라 할 것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그의 <필원잡기>에서 이 사소(또는 파소) 이야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중국측의 오인(誤認)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화사상(중국의 문물 제도를 흠모하고 따르려는 사상)에 함몰된 조선의 유학자들은 서거정의 의심을 무시한 채 중국에서 지어낸 이 이야기를 마치 "사실(事實)"인 것처럼 후손들에게 주입시켜 왔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어이없는 이야기가 20세기 후반에 편찬한 경신보 세적편 첫머리에 등장하였을까? 경신보 편찬에 참여하신 어르신들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하신 것일까? 우리로 하여금 중국 황실(제실)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시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올려 놓으신 것일까? 그것도 제목에 "사실(事實)"이라는 말까지 붙여서!!!

새로운 세보가 편찬된다고 한다. 이번에도 우리 모두를 사소(또는 파소)의 후손들로 만들 것인가? 혁거세 신라 시조왕을, 아버지 없이 잉태된 중국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새로운 세보 편찬에 관여하시는 분들께서는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하셔야 할 것이다. 그 무슨 "전통" 운운하시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시는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보이지 않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보(족보)도 역사(歷史)다. 역사의식이 없는 세보(족보)는 영혼이 없는 빈 껍데기일 뿐이다.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 중국인가, 한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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