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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판관공파(判官公派)와 군수공파(郡守公派)의 낙남(落南)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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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18 16:17 조회6,475회 댓글0건

본문

아래의 글은 판관공파 홈페이지에 판관공파 후예인 문학박사 찬수씨가 쓰신 글을 퍼온 글입니다.

※ 12일 군수공파 종원님들께서 평도공의 묘 참배와 관련되어

군수공파와 판관공파의 남낙 유래를 알아 보고자 합니다.

※ 오래전에 발표한글로

새로히 몇 곳을 수정하였기에 다시 올립니다




서언(緖言)

평도공(平度公; 訔)의 맏 자제이신 참판공(參判公; 葵)께서는 4자(子) 5녀(女)를 두셨는데 그 네 분 아드님들이 곧 휘(諱)가 병문(秉文; 司直公) ․ 병균(秉鈞; 判官公) ․ 병중(秉中; 護軍公) ․ 병덕(秉德; 郡守公)으로 이른바 병자(秉字) 4형제분들이다. 이들 네 분 중 첫째 사직공과 셋째 호군공 두 분의 자손들은 수도권을 중심으로 기호(畿湖) 지방에 터전을 잡았지만, 둘째 판관공과 넷째 군수공 자손들은 안동(安東)․예천(醴泉) 지역으로 낙향하여 영남인(嶺南人)이 되었다. 두 분 자손들의 낙남 이유에 대해 후손들은 궁금해 하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어 각양(各樣)의 전설(傳說)이 회자(膾炙)되는데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해 주는 것은 없다. 그 전설의 내용을 개괄(槪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판광공과 군수공 내외분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고아가 된 증 좌부승지공(贈左副承旨公; 숙) 등 4명의 종반(從班)들이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부임한 고모부(姑母夫) 임자번(林自蕃; 醴泉人)을 따라 낙남(落南)하였다.

② 아니다. 고모부가 아니고 대고모부(大姑母夫; 尊姑母夫)인 이중(李重; 陽城人)이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할 때 따라왔다.

또, 판관공 부부와 군수공(郡守公)이 거의 동시에 급서(急逝)한 이유에 대해서도,

① 역질(疫疾)의 감염으로 두 형제분 부부가 함께 돌아가시고 자손들은 고아가 되었다.

② 아니다. 단종(端宗) 복위(復位) 사건에 연루되어 동시에 화를 입어 돌아가셨는데,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어 역질이라 한다.

이상과 같이 이설(異說)이 분분한 이유는, 당시에 기록된 분명한 문적(文籍)이 없고, 몇 세대가 흐른 뒤에 집안에 전승되어 오던 말들을 소고(嘯皐) 선조께서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들으면 들을수록 의혹이 증폭되어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자 경신보 편찬 직후(1982)에 이른바《낙남실기(落南實記)》가 편찬되었지만, 후손들의 궁금증을 해소한 것이 아니라 낙남 사유에 대해 후손들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오히려 궁금증은 확대 재생산된 감이 없지 않다.

필자는 판관공 말예(末裔)의 한 사람으로서, 명색이 역사 공부를 하고, 평생토록 역사 관련 기록을 다루는 업무에 종사했으면서도 그 동안 종중(宗中)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 현 韓國古典飜譯院의 前身)를 퇴직한 후, 근자(近者)에《국역 소고선생문집(嘯皐先生文集)》편찬에 참여하면서 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역사학도로서, 또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판광공과 군수공께서는 모두 음관(蔭官)으로 출사(出仕)하여 관직도 참상직(參上職)인 종5품 판관(判官)과 종4품 군수(郡守)에 그쳤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다른 사람들의 문집(文集)에서는 언급된 기록이 전무하였다. 할 수 없이 시대 상황과 주변 인물, 그리고 혼인 관계에 있는 여러 가문의 족보(族譜)를 통해 사실에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낙남에 관련된 가장 오래되고 믿을 만한 기록은, 소고(嘯皐) 선조께서 62세 때인 선조(宣祖) 11년(1578) 5월,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셨다가 그해 늦가을에 고양(高陽) 원당(院堂)의 판관공 묘소를 참배하고 제사를 올릴 때의 제문(祭文)①과 이듬해 9월에 묘소에 입석(立石)한 판관공 비문(碑文)②이 전부이다. 관련 기록을 발췌(拔萃)하여 당시의 사실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① “…가문에 복이 없어 젊으신 나이에 부부가 함께 요절하셨네. 어린 고아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 고난을 겪다가 고모를 따라 영외(嶺外)로 가서 아내로 인연하여 화산(花山; 安東)에 터전을 잡았네. 이곳에서 낳고 길러 자손들이 번성했네.…[門戶不祿 偕逝靑年 孤兒黃口 失依顚連 隨姑嶺外 因室花廛 自玆生育 螽羽신先+先]<嘯皐先生文集 卷之三 祭文 祭先祖文>

② “공의 휘는 병균이고, 자는 자평(子平)이며,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봉직랑(奉職郞)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지내고 홍주(洪州)의 통판(通判; 판관)으로 재직 중 졸하시었다. 배위(配位)는 흥양류씨(興陽柳氏; 高興柳氏)이고,……아들 하나는 숙(孰+石)이며, 세 사위는 별좌(別坐) 김오(金晤) ․ 진사 김진효(金進孝) ․ 내금위(內禁衛) 오익사(吳益師)이다.……오호라 공은 현벌명가(顯閥名家)의 자제로서 일찍부터 유품(流品; 品官)을 익혔으므로, 언행이나 사업에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었을 것인데, 고찰할 길이 없다. 일찍이 듣기로 공(公) 부부가 일시에 요절하시어 어린 고아들이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서울과 지방의 백씨(伯氏)와 숙씨(叔氏)들이 나누어 맡아 길러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고 한다. 대개 승지공은 안동에 거주하였고, 자매들은 시집가서 파주(坡州) ․ 충주(忠州) ․ 전주(全州)에 있었으니, 공의 평생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개괄(槪括)에 대해서는 전해들은 자가 많을 것인데,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몽매하여 수수(授受)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생졸년(生卒年)과 제배(除拜) 사실 또한 모두 민몰(泯沒)되었으니 선조(先祖)를 소홀히 하고 원대(遠代)를 잃어버린 죄가 극에 달하였다. 슬프도다. 공의 묘소는 고양(高陽) 원당리(圓堂里; 院堂里)에 있으니, 실로 류씨(柳氏) 일족의 족장지(族葬地)이다.”[嘯皐先生文集 卷之四 碑銘墓誌] <贈通訓大夫 通禮院左通禮 奉職郞 洪州判官 朴公墓碣銘>

①은 허물어진 봉분을 보고 자손으로서 여러 해 동안 돌보지 못한 죄를 자책하면서 지은 4언(言) 44구(句)로 된 제문(祭文)인데, “판관공 내외분께서 일시에 돌아가시자 고아가 된 좌부승지공(贈左副承旨公)이 고모를 따라 안동으로 가서 그곳에서 장가들어 처향(妻鄕)에 근거를 잡게 되었다.”는 내용이고, ②의 비문에는 고아들의 낙남 사유에 대해 “공(公)의 부부가 일시에 요절하시어 어린 고아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서울과 지방의 백씨와 숙씨들이 나누어 맡아 길러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고 하여, ①과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즉 ①의 제문 기록은 좌부승지공이 고모부를 따라 안동으로 내려가 처향에 터전을 잡은 사실을 드러내었고, ②의 비문은 고아들을 양육한 주체가 “백숙부(伯叔父)들”이라고 하여 친가(親家)쪽에서 양육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서로 모순되는 듯 하지만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제문에서는 좌부승지공 한 분의 낙남 사유만 강조되었고, 비문에서는 4남매의 가취(嫁娶)를 말한 것이며, 뒤에 언급하겠지만, ‘백숙부’라는 용어도 조선 전기에는 친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척(姻戚)의 숙항(叔行)도 망라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들 기록은 판관공 내외분께서 급서(急逝)하신 지 3세대 뒤인, 백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관공의 생몰 연대나 제수(除授) 기록, 급서(急逝)의 원인 등 구체적인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로 되어 있다. 이는 소고 선조께서도 한탄했듯이 확실한 기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이미 당시에도 불확실한 “…했다고 한다.”는 전문(傳聞)에 근거한 기술로서 더 이상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 기록들이 비록 불명확하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어, 판관공의 묘소가 실전(失傳)되지 않게 하신 점과 아울러 소고 선조께 더욱 감사할 뿐이다.

이것은 판관공에 관한 기록이지만, 군수공 후손도 같은 처지였다고 전해 오는데, 앞으로의 논증에서 알 수 있듯이 함께 낙남했으리라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낙남한 고아들은 고모할머니 입장에서 똑 같은 친정 조카들이며, 승지공은 당시 거의 성인이 되었지만 군수공 자녀들은 10세 전후의 어린 고아들로 가호의 손길이 더욱 절실한 때문이다.

기록이 불명한 까닭에 그에 대한 추측도 다양하게 나오기 마련이고, 또 원문 해석에 있어서도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어 이론(異論)이 분분하다. 그러나 두 형제 내외분이 일시에 돌아가시어 두 집안의 고아들이 친인척(親姻戚) 누군가의 주도(主導)로 안동․ 예천 지역에 낙남했다는 설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갔다.

혹시 다른 기록이 없나 하고,《조선왕조실록》․《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등에서 두루 찾아보았으나 두 분에 대한 기록은 물론, 병자(秉字) 항렬 네 분 중 한 분도 실록 등에서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이 없고, 유일한 기록이 호군공[秉中]인데, 호군공도 맏 따님이 양성지(梁誠之)의 둘째 며느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비문에서 언급되었을 뿐이다. 이는 네 분들이 모두 음사(蔭仕) 출신으로 벼슬도 중하급 관직에 그쳤기 때문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홍성군지(洪城郡誌) 선생안(先生案)에는 어떤 단서가 있지 않을까 하여 군지를 뒤져 보았지만 일부 기간의 목사 명단만 남아 있을 뿐 판관 명단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기대할 것은 각 문중의 족보나 지방행정 제도의 변천, 관련이 있을 듯한 인물들의 인사 기록(人事記錄), 해당 시기의 주변 상황 등을 통해 사실에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먼저 부모님들이 요절하신 까닭을 유추(類推)해 보고, 다음으로 누구를 따라 낙남했을 것인가를 검토하기로 하자.

1. 두 분 후손들이 고아가 된 사연

여기에 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후손들 간에 두 가지 주장이 있다. 하나는 역질(疫疾; 傳染病)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정변(政變)으로 형제분이 희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자(前者; 疫疾說)는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통설(通說)이고, 후자(後者; 政變說)는 아무리 역질이라고 하더라도 두 집안 양주(兩主) 내외분이 동시에 별세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가정(假定) 하에서, 우리 역사를 어느 정도 아는 후손들이 그 시기가 대개 조선 세조(世祖)의 즉위 초년으로 추측되고, 또 실제로 금성대군(錦城大君)에 의한 단종(端宗) 복위모의가 안동에서 가까운 순흥(順興)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추측, 양성(釀成)된 전설이다.

그러나 후자의 이런 주장은 조선시대의 역모(逆謀) 사건 처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애당초 성립이 될 수 없는 이야기이다. 단종이 복권(復權)되기까지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역질을 가탁(假託)했을 가능성도 있다지만, 이 또한 타당하지 않다. 만약 복위 사건에 관련되어 화를 당했다면, 역적으로 몰려 관작(官爵)은 추탈(追奪)되고, 가족들은 화를 입고 가산(家産)이 적몰되었을 것이며, 설사 자손이 살아 있었다고 하더라도 단종 묘에 대한 제향(祭享) 논의가 시작되는 중종 대 이전까지는 숨도 크게 못 쉬고 숨어 살아야 했을 터이고, 단종이 복권되는 숙종 24년(1698)까지는 출사(出仕)가 불가능했을 터인데, 자손들이 아무런 화도 입지 않고 관직에도 나아가고, 드러난 사족들과 통혼(通婚)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 직손인 소고 선조께서 당상관(堂上官)이란 고관(高官)이 되어 증조부의 비문에 관직을 그대로 쓴 사실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역률(逆律)을 범하면 남자들은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모두 노비가 되는 것이 당시의 국법이었기 때문에 혹 몸을 숨겨 생명을 보존한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복권(復權)해 주기 전까지는 세상에 존재를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친인척 관계가 단종 쪽보다는 세조 측에 훨씬 가깝다는 사실이다. 즉, 판관공의 매제(妹弟)인 임자번(林子蕃)은 본래 무과 출신으로 한미한 집안이었는데 일찍부터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발탁되어 단종 1년, 세종조(世宗朝)의 중신(重臣)이었던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한 뒤 내린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훈(策勳), 양양군(襄陽君)에 봉군(封君)되고 벼슬은 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참판공의 동생이며 판관공에게 숙부가 되는 세양공(世讓公; 薑)은, 그 본심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세조 즉위년에 즉위를 도운 공로로 내린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훈(策勳), 금천군(錦川君)에 봉군되어 관직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 황해도도순찰사(黃海道都巡察使)에 이르렀고, 세조 6년(1460)에 종명(終命)하자 세양(世讓)이란 시호(諡號)까지 받았다. 그리고 호군공(秉中)의 맏사위가 양수(梁琇)인데, 양수의 아버지인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 南原梁氏)는 세조조 정치의 일급 참모로서 관직은 판서에 이르렀고, 세조대의 주요 정책들이 많은 부분 그에게서 나왔으며, 특히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경륜(經綸)인 국방정책(國防政策)에 있어서는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친인척 관계에서 볼 때, 세종의 탁고(託孤)를 받은 것도 아니고, 문종이나 단종과 특별한 인연도 없는 미관말직(微官末職)의 음관(蔭官) 출신들이 단종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을 개연성(蓋然性)은 전무한 것이다. 따라서 두 분 내외가 정변에 희생되었을 것이란 가설(假說)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다음, 역질(疫疾)이었을 가능성을 살펴보자.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가 그러하고, 또 실제 역질이었을 것으로 볼 여러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역질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두 집 부모들이 모두 동시에 돌아가고 어린 자녀들은 탈 없이 고아로 남을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약점이다. 현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일이고, 이것이 정변론에 힘을 실어 주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는, 의술이 발달되지 않은 전근대 사회였다는 사실과, 그 장소가 객지(客地)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당시 상황을 유추(類推)해 보면 실마리가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비문에서 “홍주 판관 재직 중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이 내용은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관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솔가(率家)의 경우도 있었지만, 가족은 본거지에 두고 단신으로 부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 본다면 대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판관공께서 임지(任地)에서 병환이 나셨다는 연락이 오자, 서울(?)의 본가(本家)에 있던 할머니는 어린 자식들은 남겨 둔 채 허급지급 행장을 꾸려 남편의 임지인 홍주(洪州; 지금의 洪城)로 달려갔을 것이지만, 남편을 구원하기는커녕 당신도 함께 역질에 감염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상정(想定)할 수 있다. 한편, 판관공께서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자―혹은 부음(訃音)을 듣고― 불과 백 리 이내 거리인 온양군수(溫陽郡守)로 재직 중이던 군수공 또한 중형(仲兄)의 임지로 달려갔을 것이다.―온양이 아니더라도 급보를 받았으면 달려갔을 것임.―문병을 왔건, 장례를 치르러 왔건 간에 형님이 걸린 역질에 동생분이 감염되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이 간다. 현대라면 병원균 오염 가능 지역에 사람의 출입을 막고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이 일차적인 조처였겠지만, 당시로서는 그렇지 못했고, 비록 역질임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남이 아닌 형제간의 출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둘째인 판관공과 넷째인 군수공 사이는 형제분들 중에서도 특별히 정이 돈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4촌들 간에 같은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지금은 같은 본관(本貫)이면 같은 돌림자를 사용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 이후 족보(族譜) 편찬이 본격화된 뒤에 만들어진 전통이고―반남 박씨도 항렬자가 완전한 통일을 본 것은 19세(世) ‘〇源’자 이후이고 그 전에는 지역과 계파에 따라 제각각이었다.―조선 전기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아직 동족 개념이 후기처럼 강화되지 않아 항렬(行列)자도 친형제 간에만 통용될 뿐, 4촌간에도 쓰지 않는 것이 대부분 사족(士族)들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런데, 두 분 자손들은 돌림자에 같은 부수(部首)의 외자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자별(自別)한 관계였음을 알 수가 있다. 항렬자는 두 자 이름이면 중간이나 끝 글자 하나를 같은 글자로 하고, 외자일 경우에는 같은 부수의 글자를 사용하는데, 판관공(秉鈞)의 아랫대는 숙(孰+石; 承旨公), 군수공(秉德)의 아랫대는 자(石+慈; 司猛公) ․ 거(磲; 進士公) ․ 반(磐; 禦侮公)으로 모두 돌석(石) 부수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 사직공(秉文) 아랫대는 임종(林宗) ․ 임정(林楨) 등 수풀림(林)자 항렬이고, 호군공(秉中) 아랫대는 로(輅) ․ 주(輳) 등 수레거(車) 부수의 외자 이름을 쓰고 있다. 이러한 두 분 사이의 특별한 정분(情分)과 임지(任地)가 인접해 있었다는 지리상의 조건은, 군수공 입장에서 중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이나 부음(訃音)을 들었을 때 지체 없이 달려갔을 것이고, 도착 후에 역질로 인한 사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안위(安危)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역질로 형제간에 함께 참변을 당하는 일은 후대에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과학 지식이 결여되고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는, 疫疾의 전염성은 어느 정도 인지(認知)했다고 하더라도 병이 어떻게 전파되는지 전염 경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환자를 격리시켜 치료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같이 생활하면서 간호하다 보니 가족 간에 전염되기 일쑤였고, 남이면 무서워 발길을 끊었겠지만 형제간에는 그럴 수도 없으니, 역질로 형제간에 화를 당한 일이 문집(文集) 등에서 흔히 보이고 있다. 남의 얘기 할 것 없이, 우리 집에서도 1938년 3월 초, 장질부사로 조부님(諱 勝夏)께서 돌아가셨고, 선친(先親; 휘 義緖)은 회복되셨지만, 그때 한 마을에 살던 삼촌(휘 禮緖)과 사촌이 함께 변을 당했고, 조부님의 부음을 듣고 대구에서 오신 종조부님(휘 勝洪)께서는 장례를 마치고 귀가(歸家)하신 즉시 같은 병에 감염이 되어 작고하시었다. 이처럼 옛날의 역질은 친족 간에는 피할 수 없는 액운(厄運)이었다. 따라서 판관공의 역질은 동생인 군수공 내외분까지 거의 동시에 불귀의 객이 되게 만들었지만, 그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던 아랫대 10남매는 다행히도 무사했던 것이다.

2. 낙남(落南)의 주도자는 누가였을까?

다음, 안동(安東)으로 낙남한 경위가 어떠했는가를 구명(究明)해 보기로 하자. 대부분 15세 미만의 어린 고아들이 스스로 낙남할 리는 없고 후견인이 있었을 것인데 그가 누구였느냐는 점이다. 위에 인용한 제문과 비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어린 고아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 고난을 겪다가 고모를 따라 영외(嶺外)로 가, 아내로 인연하여 화산(花山; 安東)에 터전을 잡았네.…[孤兒黃口 失依顚連 隨姑嶺外 因室花廛]<祭文>

“…공(公) 부부가 일시에 요절하여 어린 고아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서울과 지방의 백씨(伯氏)와 숙씨(叔氏)들이 나누어 맡아 길러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고 한다. 대개 승지공은 안동에 거주하였고, 자매들은 시집가서 파주 ․ 충주(忠州) ․ 전주(全州)에 있었으니…[嘗聞 公夫婦 一時夭逝 孤幼無託 京外伯叔 分育而嫁娶之 蓋承旨公居安東 姉妹歸在坡忠全三州]”<碑文>

당시에 고아가 된 이들은 판관공이 4남매, 군수공이 6남매로 모두 10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비문에 쓰인 대로 생존한 두 분의 백숙부가 맡아 양육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위의 인용문에서도 보이듯이 “경외의 백숙부들이 나누어 맡아 길러 장가들이고 시집보냈다.”고 한 것이다. 기존의 번역에 이 문장을 “서울의 외백숙(京外伯叔)”으로 풀이하여 오역(誤譯)의 시비도 있었는데, “경외백숙”을 “서울의 외백숙부”로 번역하기보다는 아무래도 “서울과 지방에 사는 백부와 숙부들”로 보는 것이 순리일 듯하고, 그렇다고 이 백숙부들을 친가(親家)쪽 백숙부들로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직공과 호군공은 산직(散職)인 군직(軍職)에 있었으니, “지방의 백숙부”라는 표현과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백숙(伯叔)은 백부와 숙부들로서 맏이인, 사직공(秉文)과 셋째 호군공(秉中) 두 분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당시의 관습으로는 친가(親家)는 물론 외삼촌 ․ 고모부 등 인척(姻戚)의 숙항(叔行)까지도 포괄하는 표현이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조선 전기에는, 후기와는 달리 고려시대(高麗時代)의 관습이 그대로 계승되어 오고 있어 동종(同宗) 개념보다는 혈족(血族; 조선 후기 이후에는 親族을 혈족이라 했다) 개념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친가의 4~5촌보다는 인척(姻戚)의 3~4촌을 훨씬 더 가깝게 여겼다. 조선 초기만 해도 아직《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이 일반화되지 않아 삼년상(三年喪)을 치루는 사람이 있으면 특기(特記)할 정도이고, 종법체제(宗法體制)가 정착되지 않아 동종끼리 결혼도 했으며, 종가(宗家) 또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게 아니었다. 동성동본은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동종 개념보다는 처가 ․ 외가의 혈족이 중시되는 사회였다.

그래서 재산도 아들딸이나 장유(長幼)의 구별 없이 균등히 분배되었고, 제사(祭祀)도 장남에게 일차적 책임은 있었지만, 반드시 장남이 모셔야 한다는 의무적인 관습이 확립되어 있지 않아 아무나 모실 수 있었다. 단지, 제사를 맡는 사람에게는 분재(分財) 때에 제수용(祭需用) 몫이 더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요즈음 아이들이 친인척(親姻戚)을 막론하고 모두 사촌(四寸)으로 부르듯 이종(姨從)이나 고종(姑從)도 친사촌과 다를 것이 없었다. 조선 전기의 많은 명인(名人)들이 처향(妻鄕)에 정착하여 외손이 한 마을에 섞여 살며,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養子)를 들이기보다는 외손봉사(外孫奉祀)가 더 자연스런 관행(慣行)이었다. 판관공의 묘소를 처가인 고흥유씨(高興柳氏)의 족장지에 쓴 것도 우연이 아니다. 장지(葬地)만 빌린 것이 아니라 장례에도 분명히 처가의 많은 협조를 받았을 것이고, 일부 자매는 외가에서 양육되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이는 혈족을 중시하는 고려시대의 유풍(遺風)에서 기인(基因)한 것이다.

요즈음은 족보가 한 성씨의 자손록(子孫錄) 쯤으로 치부되지만 조선 전기에 있어서는 배우자(配偶者)의 부(父) ․ 조부(祖父) ․ 외조부(外祖父)까지 기록해 놓아 몇몇 문중의 족보만 모으면 당대 지배 계층의 대부분을 망라할 수 있다. 때문에 초기에 만들어진 족보들은 당대 사회사(社會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조선 초기에 나온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 1476년 刊)나 문화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 1562년 刊, 初刊은 1423년) 등을 비롯한 몇몇 씨족들의 족보만 보면 조선(朝鮮) 초기(初期) 지배 계층 인물들이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즉, 외외손(外外孫)까지 수록되어 있어 한 성씨의 족보라고 하지만 실제는 타성(他姓)이 80~9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화보의 경우, 수록 인원 9,000여 명 중 안동권씨 본계(本系)의 남자 수는 380여명에 불과하다. 그리고 동성(同姓) 간에 결혼을 하여 같은 안동권씨가 외손(外孫)으로 등재(登載)된 것도 많이 있다. 조선 전기 족보가 이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처음 만드는 것이라 인원이 많지 않은 까닭도 한 요인이 되었겠지만, 무엇보다 혈족을 중시한 당시의 전통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습 하에서는 친 백숙부냐, 외삼촌이냐, 고모부냐의 관계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어느 분이 고아가 된 조카들에게 애정과 관심이 깊으며, 누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어 조카들을 부양할 여건이 되느냐의 문제였다. 여기에 우선적으로 고려될 것은 판관공과 군수공의 고아들이 처음 낙남한 지역인 안동(安東)이라는 지역과의 관련성이다.

그런데 친 백숙부들 중 백부인 휘 병문의 관직은 부사직(副司直)이고, 휘 병중의 관직은 상호군(上護軍; 이는 최종 관직이기 때문에 당시의 관직은 더 낮았을 것임)으로 안동(安東)이라는 지역과 연관을 지을 분은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경제 사정 또한 여의치 못했을 것이다. 주지(周知)하다시피 사직 ․ 호군 등의 관직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소속된 서반직(西班職; 武官職)으로 실무가 없는 산직(散職)이었다. 산직이란 글자그대로 현직이 아닌 한산(閑散)한 직책을 말한다. 부조(父祖)의 음덕으로 산직을 받는 경우와 관원(官員)에게 무슨 일이 있어 탄핵을 받아 면직을 당했을 때, 그냥 버려두면 서울에서의 생계 수단이 막연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다음에 다른 관직에 임명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관이지만 무관직을 주어(이를 서반으로 보낸다는 뜻에서 送西라 한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주어 다른 관직에 제수될 때까지 서울에 머물게 하는 일종의 기미책(羈縻策)이었는데, 많은 문음(門蔭)들도 이 산직에 소속되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 사직공과 호군공은 파주 등 고향에 농장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직의 녹봉만 가지고는 조카들까지 양육하며 교육시키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중앙관서의 실직(實職)도 녹봉(祿俸)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봉양할 부모가 있는 사람들은 출세가 지연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도 고을 수령(守令)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였던 것이니, 수령이 되면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령은 한 고을의 행정 ․ 사법권을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의 성주(城主)로서 몇 식구 더 부양하는 일은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다만, 친 백숙부들이 비록 산직이라고 하지만, 질녀 한두 명 양육하다가 출가시키는 일은 가능했을 것이다. 앞서, 판관공의 세 따님들이 파주 ․ 충주 ․ 전주로 멀리 출가했다고 하였다. 판관공의 아드님이 부모님을 여읠 때의 나이가 대략 15세 이전으로 보이는데, 손위의 청풍김씨(淸風金氏)로 출가(出嫁)한 누님은 부모님 생전에 혼사를 치루었을 가능성이 많아 제대로 된 혼처를 구했을 것이니, 아마도 파주에 살았다는 분이 이 분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두 여동생들은 12~3세와 10여세 정도일 터인데, 이분들은 아마도 외가(外家)나 친가 백숙부들에 양육되다가 이들의 친인척(親姻戚) 연줄로 혼사가 이루어지다보니 멀리 충주와 전주로 출가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군수공의 6남매는 단언할 수는 없지만, 판관공의 자녀들보다 더 어렸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아들 3형제는 안동 ․ 예천 등지에 함께 낙남한 것으로 보이지만, 따님들은 어디에서 생장하여 출가했는지 알 수 없다. 군수공 내외분의 묘소가 “원래는 양근(陽根)의 유을산(酉乙山)에 합부(合祔)했으나 실전(失傳)되었다.”고 했으니, 군수공도 판관공처럼 처가의 족장지에 장례를 모셨는지, 그랬다면 따님들이 혹 외가에서 양육되었는지, 역시 오리무중이다.

어쨌든 두 분들의 아드님 네 종반들은 모두 낙남하여 안동지역에 터전을 잡은 것은 분명하니,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시기에 가까운 친인척 중 누가 안동의 지방관으로 부임했느냐를 찾다 보면, 자연 대고모부(大姑母夫) 이중과 예천이 고향인 고모부 양양군 임자번이 부각되어 일찍부터 이들 두 분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앞서의 제문(祭文)에 “고모를 따라 영외(嶺外)로 가서[隨姑嶺外]”라는 대목에서 고(姑)자에 얽매여 “고모부 양양군”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4자구(字句)를 만들다 보니 고(姑)자가 들어갔는데 대고모도 글을 짓자면 이렇게 쓸 수밖에 없고, 또 뒤에 언급하겠지만 두 분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었으니 대고모와 고모의 합칭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로 대고모부 이중(李重)은 세조 4년(1458) 6월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에 제수되고, 고모부 양양군 임자번(林自蕃)은 예종(睿宗) 1년(1469) 현재 경상좌도절도사(慶尙左道節度使; 당시 慶尙左道節度使營이 蔚山에 있었으므로 안동과는 거리가 멀다)로 재직 중임이 실록에서 확인되었다.(實錄 世祖 1年 6月 28日 甲申 및 睿宗 1年 6月 22日 甲戌 參照) 이상 사실을 염두에 두고 판관공 자제인 좌부승지공의 기록과 비교해 보자. 판관공의 5대손인 육우당(六友堂; 贈左副承旨, 諱 檜茂)이 찬(撰)한 비문에 의하면,

“…증 좌부승지공(贈左副承旨公; 판관공의 자제, 휘 숙)은 세종 26년(1444)에 출생하여 조년(早年)에 부모를 여의고 안동부 능성구씨(綾城具氏)에 장가드시니 사용(司勇) 익명(益命)의 따님이다. 서울에서 안동부 북주구리(北住邱里)에 이사하여 중종(中宗) 21년 병술(丙戌; 1526)에 졸하시니 향년이 83세이다.…공은 음사(蔭仕)로 충좌위(忠佐衛) 부사직(副司直)인데, 손자인 승임(承任)의 귀현(貴顯)으로 좌부승지에 증직되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곧 제문에서 “아내로 인연하여 화산(花山; 安東)에 터전을 잡았네.[因室花廛]”라고 한 것으로 좌부승지공께서 처향(妻鄕)에 터전을 잡게 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 인용된 육우당이 지은 비문의 연대 기록이 사실이라면, 대고모부 이중이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할 때 증 좌부승지공(숙)은 15세이다. 여기서 두 가지 면을 상정(想定)할 수 있는데, 안동부의 능성구씨(綾城具氏)에게 장가들어 안동으로 갔느냐? 아니면 안동으로 낙남했다가 능성구씨에 장가들었느냐? 둘 중 어느 것이 선후(先後)냐의 문제이다. 그 당시의 결혼 관습으로 보아 사족(士族)의 남아(男兒) 15~6세면 결혼 적령기인데, 부승지공은 결혼 적령기인 15세이고 부인 구씨(具氏)는 동갑이며, 고모부 양양군 가문의 혼맥(婚脈) 관계로 볼 때 결혼을 한 뒤에 처가가 있는 안동으로 내려갔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군수공의 자제 3형제와 함께 종반 4형제가 행동을 같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네 고아를 보살피는 일을 지방 수령이 아닌 한 개인이 맡기는 버거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안동도호부사로 부임하는 대고모부 이중(李重)을 따라 안동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혼처를 구해―혹은 이미 내정된 혼처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하겠다. 그리고 대고모부 이중이 무후(無後)로 되어 있는데, 대고모(大姑母) 할머니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것 또한 친정붙이들이 도움을 받을 보다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추론(推論)이 타당하다면, 판관공의 병몰(病沒)은 세조 4년(1458) 이전의 가까운 어느 해로 추정된다.《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규정된 수령(守令)의 임기가 5년인데, 안동부 <임사록(任事錄) 선생안>에 의하면, 대고모부 이중은 부임한 이듬해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다. 비록 임기는 짧았다고 하더라도, 처가 족손들에 대한 양육 대책은 어느 정도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대고모부의 경제적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모부 양양군 내외분의 역할이 없었다면 낙남(落南)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 치 건너 두 치”라는 속담도 있듯이 3촌인 고모와 4촌간인 대고모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아가 된 친정 조카들에 대한 고모의 정이 더 애틋했을 것임은 짐작이 간다. 게다가 혼맥 관계로 보나, 양양군의 고향이 예천이라는 사실, 그리고 당시 1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군수공의 둘째와 셋째 자제분들은 예천에서 생장했다는 전해 오는 이야기 등 여러 가지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즉, 대고모부가 안동대도호부사를 제수받자 고아가 된 친정 조카들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고모할머니가 당신의 고모부이기도 한 대고모부 이중 부부와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의논했을 것이고, 여기에는 고모부 양양군 가문과 안동 사족들과의 혼맥(婚脈) 관계 및 고향이 안동과 가까운 예천(醴泉)이라는 것도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이때 이미 양양군 고모할머니의 흉중에는 판관공의 외아드님인 승지공의 혼처에 대한 구상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는 양양군과 인척 관계에 있는 안동 사족들인 능성구씨와 안동권씨(安東權氏) 등 몇몇 성씨들의 족보를 검토한 결과 두 종반들의 혼사에 예천임씨의 역할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래 혼인 관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판관공과 군수공의 자손들이 안동을 처향(妻鄕)으로 하여 영남인이 된 배경에는 고모부 임씨 가문의 역할이 컸다.(아래의 婚姻 關係 圖表 參照)

고모부 양양군은, 고려 중기, 시(詩)로 일세를 풍미(風靡)하던 서하(西河) 임춘(林椿)의 후예인데, 임춘은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난을 일으켜 문신들을 도륙(屠戮)하자 난을 피해 불우한 세워를 보내다가 예천에 은거하여 예천임씨(醴泉林氏)의 시조가 되었다. 예천임씨는 고려 후기에는 두드러진 활동이 없었으나 조선 초기 임자번이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녹훈(錄勳)됨으로써 문호(門戶)를 일으켰다. 고모부 양양군의 역할을 중시하는 까닭은 혼맥 관계로 보아 처질(妻姪)들의 혼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단(推斷)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물론 혼사(婚事)란 내면적으로는 부인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고모할머니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즉, 증 좌부승지공(숙)이 능성구씨 익명(益命)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손위 동서(同壻)가 바로 양양군의 동생인 임자무(林自茂)이다. 구익명(具益命)은 고려 우왕(禑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구홍(具鴻)의 손자인데, 구익명이 청주정씨(淸州鄭氏) 정약(鄭若)의 사위가 됨으로써 면천(沔川)에서 처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터전을 잡아 안동의 사족이 되었다. 구씨와의 혼사는 아마 고모할머니가 고아인 친정 조카의 혼처(婚處)를 물색하다가 동서(同壻)에게 부탁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구익명의 차남이며 좌부승지공의 처남인 인서(仁恕)는, 지금까지도 안동 지역의

◎ 綾城具氏와의 婚姻關係 ◎ 安東權氏와의 婚姻關係

具鴻――宗之 權厚――----啓經――王+介

――宗節 ――琨――士英

――宗裕 ――士彬――橃

――宗秀―――――益命――仁忠 ――士華

鄭若女――仁恕 ――士秀

權自經女 ――女(朴磁, 郡守公子)

――仁信 ――自經――-璘

――仁貞 ――-계

――女(林自茂) ――-女(具仁恕)

――女(朴孰+石, 判官公子) ――-女

최대 성씨인, 안동권씨 자경(自經)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안동에 거주하는 안동권씨의

대다수는 14세기 말, 안동으로 낙향한 고려조의 예의판서(禮儀判書) 권인(權靷)의 후손들이

다. 권인은 고려의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일 때, 벼슬을 버리고 안동부 풍산면(豊山面)노동(魯洞)에 은거했는데, 자경은 그 직계 후손이다. 또 자경의 백씨(伯氏)인 계경(啓經)은

함께 고아가 되어 낙남한 군수공의 맏 자제인 박자(朴石+慈)를 손서(孫壻)로 맞았는데, 군

수공의 둘째 자제인 거(磲) 또한 안동의 사족인 예안이씨(禮安李氏) 직장(直長) 의간(義幹)

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막내인 반(磐)은 처가가 안동김씨(安東金氏)로만 되어 있고, 처부(妻父)나 처조부(妻祖父)의 이름이 없어 어느 가문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안동김씨 역시 안

동의 대표적 토성(土姓) 중 하나이고, 조선 전기까지 안동에 주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아 역

시 안동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수공의 둘째와 셋째 후손들은 주로 예천을 중심으로 살아 후손들 간에 한동안 내왕이 없다가 경신보(庚申譜; 1980) 편찬시에 연결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도 이들 두 분은 너무 어려서 양양군 고모할머니가 교향인 예천에 데려가 양육시켜 이 일대의 사족 가문과 혼사를 맺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낙남하여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에 있던 두 형제분의 자손들은 항상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모양이다. 그래서 후손들 사이에서는 “우리들은 세월이 흘러 촌수가 멀어지더라도 영원토록 동고조(同高祖) 8촌의 당내간(堂內間)처럼 지내자.”고 언약했다는 미담이 최근까지 후손들 간에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판관공과 군수공 내외분들이 세조 초년 경에 역질로 모두 서거하시고, 종반(從班) 10남매가 고아가 되니, 경외의 백부와 숙부들이 나누어 길렀는데, 그 중 아들 네 분은 대고모부 이중이 세조 4년(1458) 안동대도호부사에 제수되자 이를 연줄로 안동으로 내려왔다. 이때 양양군 고모할머니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고아들을 안동 혹은 예천 등지에서 양육하였는데, 동서인 능성구씨를 설득하여 먼저 맏이인 판관공의 자제를 장가들였고, 뒤이어 군수공의 맏 자제 또한 안동권씨에 장가들였으며, 나머지 거(磲)와 반(磐)도 차례로 예안이씨 ․ 안동김씨 등 안동을 근거지로 한 사족들에 장가들여 모두 영남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이때 처가라는 근거지가 정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니, 처가의 살림이 넉넉하면 그 재산을 따라 처향에 근거를 잡았는데, 이는 당시의 상속 관습(相續慣習)이던 남녀균분상속(男女均分相續) 체제 하에서 형성된 사족들의 일반적인 결혼 풍습이었다.―이때 처가에서 분재한 재산은 아내의 허락 없이는 남편도 절대로 손을 댈 수 없는 순수한 아내 개인 재산이었다.―때문에 조선 전기의 족보를 보면, 처향(妻鄕)을 근거로 터전을 잡은 사례는 일일이 예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서주석(徐周錫)이 지은《安東地方 氏族의 定着課程》에는 외방의 많은 씨족들이 처가나 외가를 터전 삼아 안동에 정착하여 사족(士族)의 입지를 구축한 사례를 무수히 볼 수 있다. 우선 위에서 언급한 능성구씨가 그러하고, 판관공의 막내 손자인 증 참판공(參判公; 휘 珩)도 영주(榮州)의 선성김씨(宣城金氏)에 장가들어 처향으로 이주, 영주(榮州)의 사족이 되었다.

결어(結語)

이상 논증(論證)한 것을 요약함으로써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판관공께서는 세조조(世祖朝) 초년 경(1458년 이전)에 젊은 나이로 역질에 걸려 홍주판관 재직 중 부부가 급서(急逝)하시었고, 이웃 고을인 온양의 군수로 재직 중이던 동생 군수공 부부 역시 중형(仲兄)의 급보를 받고 달려 왔다가 함께 변을 당하시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양가의 10남매들은 친인척의 백씨와 숙씨들에게 양육되어 가취(嫁娶)했는데, 이 중 남자 네 종반(從班)이 낙남하게 된 배경에는 양양군 고모할머니의 후원이 절대적이었다. 고모할머니로서는 친정 조카들이 졸지에 고아가 되자 이들을 성취(成娶)시켜 오빠와 동생의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그런데 마침, 세조 4년(1458) 6월 대고모부(大姑母夫) 이중(李重)이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안동은 양양군의 고향인 예천과는 인접한 고을이기도 하므로 고모할머니는 당신 고모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친정조카 네 사람을 양육, 성가시켜 각기 일가를 이루도록 하였는데, 이때 이중의 부인이 되신 고모할머니에게 자식이 없었다는 것도 친정 종손(從孫)들을 돌볼 수 있는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즉 두분 고모할머니는 고아가 된 친정 조카들을, 여말 선초(麗末鮮初)를 전후하여 안동에 정착한 능성구씨를 비롯하여 안동의 사족(士族)인 안동권씨 ․ 예안이씨 ․ 안동김씨 등에게 장가를 들임으로써 사고무친(四顧無親)한 고아들이 처향(妻鄕)에 정착하여 영남(嶺南)에서 사족(士族)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낙남의 주역(主役)이 대고모부였느냐 고모부였느냐 하는 논쟁은 부질없는 논란일 뿐이다. 낙남(落南)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는 고모할머니였는데, 마침 대고모부 이중이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함에 따라 그 기회를 이용했던 것이니, 결과적으로 두 분 집안의 협력에 의해 낙남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낙남에 대한 사연이라면 군수공쪽에 얽힌 이야기가 훨씬 많았을 터이다. 왜냐하면 좌부승지공은, 이미 성년이 다 되어, 처향에 정착하는 여느 사족들처럼, 혼처를 따라 낙남했을 가능성이 컸던 반면, 군수공쪽은 10세 전후의 어린 고아가 3명이나 되어, 양육하고 성취(成娶)하는 등의 문제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양양군 고모할머니의 고충도 훨씬 더 컷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판관공 중심이 된 것은, 군수공쪽은 전설로만 전해올 뿐 아무런 기록이 없고, 유일한 최초의 문적(文籍)으로 판관공의 증손인 소고 선조께서 지은 제문과 비문만 남았기 때문이다.

判官公後 贊洙 謹識

〇 參考文獻

實錄 : 世宗 ․ 文宗 ․ 端宗 ․ 世祖 ․ 睿宗 ․ 成宗朝 實錄

族譜 : 潘南朴氏 ․ 醴泉林氏 ․ 綾城具氏 ․ 安東權氏 ․ 高興柳氏 ․ 禮安李氏 ․ 淸風金氏 ․ 安東 金氏 ․ 南原梁氏 ․ 淸州鄭氏 ․ 陽川許氏 ․ 驪興閔氏 等

崔在錫 : 改訂韓國家族硏究(1982, 一志社)

徐周錫 :《安東地方氏族의 定着課程》(安東文化2~8輯)

民族文化推進會刊 : 韓國文集叢刊(3~36輯)

郡誌 : 安東郡誌 ․ 洪城郡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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