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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잊혀진 독립운동가 박찬오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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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5-07 01:57 조회3,5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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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하다가 행방불명된 종조부 박의서 못지 않게 필자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 있으니 그가 바로 재당숙 박찬오 이다.

 

필자가 박찬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뜻밖에도 종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였는데, 구체적으로 지난 1993년 4월 27일 당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마이크로 필름을 검색하던 중 놀랍게도 그의 판결문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판결문을 통하여 1940년 경기중학교에서 비밀결사조직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그가 이 조직의 핵심멤버로서 투옥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결문의 발굴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의 경기중학교 동창생이면서 동시에 같은 멤버였던 2명의 독립운동가가 지난 2008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추서가 되는 구체적인 결실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박찬오에 대하여는 지난 2009년 3월 9일에 "재당숙과 이철주 교수와의 기묘한 인연" 칼럼을 쓴 바 있으나 이번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그의 생애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박찬오는 1923년생으로 강원도 철월군 묘장면 대마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철원보통학교를 거쳐서 1936년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였으며, 그가 5학년에 재학중인 1940년 11월 결성된 비밀결사조직 CHT(조선인해방투쟁동맹)에서 핵심조직원으로 활동하던 중에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어 당시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을 거쳐서 ,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미결수로 있다가 1942년 12월 2일 재판에 의하여 단기 3년 ~ 장기 5년의 선고를 받고 수감생활을 하던 중 다시 원산형무소로 이감이 되었으며, 결국 여기서 해방을 맞이하면서 출소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23세가 된다.

 

이러한 그의 인생에 있어서 중대한 분수령이 생기니 그것은 국비유학생으로서 당시 소련 우랄산맥에 위치한 스베르들로프스크주에 있는 공과대학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스베르들로프스크주는 현 러시아의 하나의 주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속한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스 2세가 처형된 예카테린브르크이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가 다닌 공과대학의 정확한 교명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6.25 전쟁이후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어느 덧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박의서는 필자로 하여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게 한  최초의 동기부여를 준 인물이고 박찬오는 본격적으로 발굴하게 한 계기를 준 인물이기에 이 두 인물은 필자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인물들인데, 통탄스럽게도 한 분은 만주에서 다른 한 분은 러시아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그동안 여러가지 여건이 되지 않아서 박찬오에 대한 본격적인 추적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번에야 말로 그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추적하기로 결심하고 며칠전에 외교통상부에 그의 행적과 관련한 민원을 신청하였다.

 

이와 더불어 외교통상부에 민원을 신청한 것과 별도로 필자의 모든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개인적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해 볼 생각인데, 그런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그것은 과연 그가 다녔다는 공과대학의 정확한 교명이 무엇인지 이번에 어떻게 해서든지 밝혀볼 생각이며, 이제 이러한 교명을 알아낸 이후에 러시아에서의 그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하여 심층추적을 할 생각이다. 

 

 

2012년 5월 7일(월) 국제칼럼니스트 문 암  박   관   우  올 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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