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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박의서 할아버지 영전에 올립니다[100년편지-201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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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4-17 18:21 조회3,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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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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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다섯 번째 편지 - 2012년 4월 17일        

100년 편지

그리운 박의서 할아버지 영전에 올립니다  - 박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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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할아버지!

 

   제가 이렇게 ‘100년편지’를 통하여 할아버지 영전(靈前)에 편지를 올린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할아버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아버지가 구입하신 족보를 통하여 할아버지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태어나신 해는 있는데 돌아가신 연도가 없고 더불어 묘소가 없는 것이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할아버지와 손자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인데, 할아버지는 저의 친할아버지의 동생이시니 저에게는 친할아버지와 진배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려서인지 당시에는 그러한 기록에 대하여 호기심은 있었으나 그냥 가슴에만 간직한 채 어느 덧 세월은 훌쩍 지나서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흔히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니 참으로 오랜 기간동안 할아버지는 저의 가슴속에서만 존재하고 계셨던 것인데, 1992년 집안의 먼 일가 되시는 분을 통하여 할아버지가 민족주의자이셨으며,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시다가 행방불명 되셨다는 귀중한 증언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증언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제 가슴으로만 품고 있던 할아버지의 구체적인 실체를 알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바로 이 무렵을 전후하여 고종황제의 손자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대한제국 황실과 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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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박의서 할아버지에 대한 세상의 기록은 제적등본만이 유일하다. - 필자 주

   한편 할아버지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파악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할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추적을 통하여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활동을 하게 되었으니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할아버지는 바로 저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신 너무나도 고마우신 분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할아버지의 행적을 다방면으로 추적하던 중 1993년 4월 당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놀랍게도 재당숙의 판결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재당숙이 경기중학교 5학년 재학 중에 비밀결사조직에 합류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신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정작 할아버지의 기록은 찾지 못하였지만 그동안 전혀 몰랐던 재당숙의 판결문을 찾게 되었으니 그때의 감격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할아버지의 기록을 찾으려고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였지만 그 어떤 자료에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신민부(新民府)에서 활동하였던 박경순 선생님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제가 여기에 주목하였던 것은 할아버지의 호적명은 ‘박의서’이지만 자(字)가 바로 ‘박경순’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자까지 똑같아서 할아버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관련자료를 수집하여 결국은 2002년 11월에 보훈처에 할아버지와 박경순이 동일인물이라는 가정하에 독립유공자 신청서를 제출하였던 것인데, 저로서는 그야말로 최초로 신청서를 제출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그 이듬해인 2003년 8월에 보훈처에서 동일인물이라는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취지의 회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청서의 제출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그 이후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현재까지 5명의 신청서를 제출하여 그중의 2명이 지난 2008년 3․1절에 독립유공자로 추서가 되었으니 저로서는 구체적인 첫 결실을 맺게 된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3명은 안타깝게도 독립유공자로 추서가 되지 못했는데, 비록 추서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제가 발굴하여 보훈처에 신청서까지 제출한 점에 대하여는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도 할아버지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호적에는 분명히 1895년에 태어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어린 시절에 대하여 알 길이 없으며, 결정적으로 왜 호적에는 15세에 사망하신 것으로 신고가 된 것인지 이러한 내력을 알 길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엄연히 생존하여 있었고 만주에서 독립운동까지 하신 분인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매우 궁금하지만 현재 이러한 내력을 아실 만한 분들이 계시지 않은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와 더불어 할아버지의 부인과 딸도 현재 행방불명된 상황이니 한 가정으로 볼 때 완전히 풍비박산(風飛雹散)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집안의 친척분을 통하여 전해 들은 바로는 할머니가 딸을 포대기에 업고 충청도로 가셨다는 것인데, 그 이상의 내력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 손자로서 가슴이 미어집니다.

 

   사실은 제가 현재 아들이 없어 대(代)가 끊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가계(家系)를 잇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민법에 사후양자(死後養子) 제도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알고 지금도 마음은 간절하지만 할아버지에게 입적(入籍)하는 문제를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행적을 보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후손으로서 송구하지만 그래도 저로 하여금 잊혀진 독립운동가를 발굴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신 할아버지께 감사드리며, 더불어 당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던 할아버지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할아버지의 숭고한 항일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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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관우

  독립운동가 박의서 선생 從孫

 
  국제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고정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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