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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비운의 황손 이광의 불꽃같은 생애 재조명[브레이크뉴스-201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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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2-18 13:18 조회4,1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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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황손 이광의 불꽃같은 생애 재조명
황손(皇孫) 이광의 서거 60주년, 그를 애절한 마음으로 추모(追慕)
 
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icon_mail.gif
금년은 필자가 대한제국 황실과 인연을 맺은 지 정확히 20년이 되는데, 지난 8일 한국 언론사로는 최초로 "브레이크뉴스"에 비운의 황손 이광을 소개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이미 그의 생애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오늘은 32년의 불꽃같은 생애를 살았던 그의 발자취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광은 1921년 3월 30일 사동궁(寺洞宮)에서 의친왕의 7남으로 태어 났는데, 생모는 사동궁(寺洞宮)의 간호부(看護婦)로 활동하고 있던 송은점(宋恩点)이었다.
 
그런데 송은점이 이광이 두살되던 해에 사동궁(寺洞宮)을 떠나면서 의친왕비가 이광이 6세때 남연군(南延君)의 종가(宗家)인 계동궁(桂洞宮)으로 양자(養子)가기 전까지 직접 양육(養育)하였다.
 
여기서 이광의 출생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으니 그가 태어난 날이 생부(生父)인 의친왕의 출생일과 일치한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의친왕은 1877년 3월 30일생이니 이렇게 부자(父子)간에 생일이 일치하는 사례가 어느 정도 있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의친왕의 자녀들중에서 이렇게 부자(父子)간에 생일이 일치하는 경우는 의친왕과 이광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이광은 어린 시절 경성유치원(京城幼稚園)을 졸업하였는데,기록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의친왕의 자녀들이 이 곳을 졸업하였기에 신빙성이 크다고 본다.
 
여기서 문제는 초등학교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부분인데,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종로소학교(鍾路小學校)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배경은 이광의 형이 되는 이우가 1922년 일본으로 유학가기 전에 종로소학교(鍾路小學校)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고 하기 때문에 그의 동생이 되는 이광도 이 학교를 졸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현재까지 종로소학교(鍾路小學校)에 대하여 추적한 바로는 설립연도는 정확히 모르겠으며, 1946년 11월 화재가 나서 이 학교가 전소가 되었다고 하는데, 당시 종로구 견지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되는 것인데, 화재가 난 이후 학교와 관련된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필자가 종로소학교(鍾路小學校)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배경은 이광이 바로 이 학교를 졸업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에 관련기록을 찾고 싶은 것인데, 문제는 이 학교가 화재가 난 이후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학교로 바뀐 것인지 여부인데, 만약에 다른 학교로 바뀌었다면 그 학교가 오늘날 어느 학교인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나 이광의 초등학교와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필자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그동안 베일에 쌓여 있던 이 부분을 밝혀볼 생각이다.    
 
아울러 이광은 일제가 경희궁(慶熙宮)을 철거하고 세운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일본으로 건너가서 학습원(學習院) 전문학교 이공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이어서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독어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바로 이 무렵에 일제로 부터 학병징집을 강요받게 되는데, 이때 이광은 황손(皇孫)의 자존심을 지키면서 학병징집을 과감하게 거부하여 결국 학병을 거부한 다른 귀족들과 함께 함경남도 원산에 위치한 철공장으로 강제징용되어서 몇개월동안 일제로 부터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신경쇠약에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신경쇠약에 걸린 상태에서 서울로 다시 오게 되었으며, 평소에 이광에 대한 정이 남달랐던 의친왕비가 이러한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접하고 그와 함께 직접 남연군(南延君)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가서 그를 요양시켰는데, 이러한 의친왕비의 지극정성으로 그가 신경쇠약에서 회복하게 되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는데, 여기서 입학이 아닌 편입이 된 배경은 일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독어학과에 재학중에 강제징용에 끌려갔기 때문에 편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지며 1948년 8월 10일 2회로 국문학과를 졸업하게 되는데, 이것은 필자가 가지고 있는 서울대 졸업생 명부에 근거에서 확인한 것이다.
 
한편 서울대를 졸업한 이광은 이후 이화여고(梨花女高)와 숙명여전(淑明女專)에서 국어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여기에 대한 관련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학병거부 못지 않게 그의 행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는 대목인데, 그가 부산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할 당시 외무부 3등서기관의 직함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부분 역시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이 확인된다면 고종황제의 후손들중에서 최초로 외교관으로 재직하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이 황실에서 유일하게 서울대를 졸업하였으며, 특히 외교관의 직함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학병을 과감히 거부할 정도로 항일정신(抗日精神)이 투철하였으며, 평소에 중절모를 쓰고 검정 두루마기를 착용할 정도로 민족의식(民族意識)도 강하였던 이광이 그 웅장한 포부를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1952년 부산 신선대에서 수영을 하다가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서거하고 말았으니 통탄스러운 심정을 금할 길이 없도다!
 
끝으로 비운(悲運)의 황손(皇孫) 이광의 서거 6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애절한 마음으로 추모(追慕)하며, 앞으로 그가 생전(生前)에 보여 주었던 고귀(高貴)한 항일정신(抗日精神)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계승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이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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