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탁월한 국제감각 가진 비운의 군주[브레이크뉴스-201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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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탁월한 국제감각 가진 비운의 군주 |
| 대한민국의 모든 외교관들은 광해군의 탁월한 국제감각 배워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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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인물을 뒤돌아 볼 때 오늘날 그 의미가 크게 와 닿지 않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그와 는 정반대로 단지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였던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 와서도 존재가 새롭게 부활하는 인물들이 있으니 필자는 그러한 인물들 중의 한명으로 군주(君主)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국제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광해군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탁월한 국제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결국은 왕에서 군(君)으로 격하되어야 하였던 비운의 군주 광해군은 과연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광해군은 1575년 조선왕조 14대 임금인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임해군에 이어서 차남으로 탄생하며, 휘(諱)는 혼(琿) 이다. 1592년 4월 2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민심을 수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며, 왕세자로서 군사들을 총지휘하여 당당히 왜적에 항거하면서 장차 국왕으로서의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게 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불행의 전조가 싹트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시작된 왕실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원래 선조는 정통성 문제에 있어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선조의 생부(生父)인 덕흥대원군은 바로 중종의 아들이었지만, 정비가 아닌 창빈 안씨의 소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자신의 아들 중에서 정실의 소생이 나오기를 바랐건만, 정작 왕비인 의인왕후가 자손을 두지 못하고 1600년에 안타까운 임종을 하게 된다. 생전에 광해군을 마치 자신의 친아들처럼 아꼈다고 하며, 그렇게 정숙하고 품위있는 국모였다고 전하는데, 안타깝게도 소생을 두지 못한 채로 임종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인왕후에 이어서 계비로 간택된 왕후가 바로 김제남의 딸인 인목왕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목왕후가 선조가 승하하기 2년 전인 1606년 왕자를 소생하니 이가 바로 9살의 어린 나이로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죽음을 맞이한 영창대군인 것이다. 이러한 영창대군의 탄생이 하나의 도화선이 되어 선조를 비롯하여 소북파의 대신들이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기 위한 움직임이 가시화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1608년 선조가 승하를 하면서 광해군이 33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제 광해군이 즉위한 것을 계기로 임진왜란부터 자신을 지지하여 준 세력인 대북파의 강력한 후원을 받게 되면서 조정은 대북파가 장약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역모사건이 일어나게 되어 광해군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지만 대북파의 강력한 주청으로 인하여 결국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위리안치하게 되며 결국 영창대군은 1614년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화(禍)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인목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서궁으로 유폐되고, 친정 아버지인 김제남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사건이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명분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필자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광해군의 입장에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의 존재가 늘 부담스 러웠다고는 하지만 당시 좀더 포용력 있는 방법을 택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 이 솔직한 심정이다. 필자가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광해군이 재위기간 동안 펼친 여러 가지 치적이 오늘날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비록 1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재위를 하였지만, 민생안정을 위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고 양전을 설치하는 한편, 임진왜란으로 질서가 무너진 한성부를 회복하고 창덕궁의 중건을 비롯하여 경덕궁(경희궁), 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여러가지 치적을 남겼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광해군의 뛰어난 국제 감각이 있었다는 점인데, 구체적으로 후금(後金)이 광해군 때는 침략을 안 하고 공교롭게도 인조 때 침략하여 나라를 초토화시키고 결국은 한 나라의 국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였던 것이 치욕적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필자는 당시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서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을 때 광해군이 비밀리에 강홍립 장군에게 밀지를 내리어 명나라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후금(後金)에게 투항(投降)하는 방법을 취한 것은 매우 현실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의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서 대단히 합리적인 외교력을 발휘하였다고 믿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북핵문제를 외교력으로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명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실리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인데, 당시 친명정책을 대부분 지지하던 신하들로서는 이러한 광해군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며,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에다가 결국은 이러한 문제까지 빌미를 제공하여 여러 면에서 볼 때 개혁군주로서 결코 손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나는 침담한 일을 겪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노릇인가!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주(廢主)가 되어 제주도로 위리안치되어 한(恨)많은 18년의 세월을 보내고 결국 1641년 향년 67세를 일기로 비운의 승하를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비록 광해군이 윤리적인 문제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을 위하여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하고, 특히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슬기롭게 대처함으로써 후금(後金)의 침략을 막은 점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외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외교관들은 광해군의 탁월한 국제 감각을 배워야 할 것이다. pgu77@hanmail.net *필자/박관우 국제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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