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항(朴泰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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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항(朴泰恒)
숙종(肅宗) 13년 (정묘, 1687년), 알성시(謁聖試) 병과4(丙科4)
인적사항
생년(生年) 정해1647(丁亥1647)
자(字) 사심(士心)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박세해(朴世楷)
조부(祖父) 박호(朴濠)
증조부(曾祖父) 박동열(朴東說)
외조부(外祖父) 임위(林偉)
처부(妻父) 유빈(柳彬)
숙(叔) 박세모(朴世模)
자(子) 박필간(朴弼幹)
이력 및 기타사항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판돈녕부사(判敦寧府
나주시-문화관광-역사인물.
박태항(朴泰恒)
회와
반남
1647년
1737년
한양
동래부사, 충청감사, 좌찬성
인조25(1647)~영조13(1737) 호는 회와 본관은 반남, 세해의 아들로 한양서 출생.숙종13년 (1687) 안성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서 문락 헌납을 거쳐 29년 (1703)에 동래부사가 되어 금정산정을 보수한 공적이 있었으나 조정의 허가없이 대마도와 교역을 전결했다 하여 파면되었다가 그 다음해 승지로 기용되어 31년(1705)에 충청감사, 32년(1706) 예조참의 동지부사 청나라를 다녀와서 대사간 이조참의에 이르 고 38년(1712)에 강원감사, 경종원년(1721)에 예조참판 2년에 경기감사를 역임하고 소론의 입장에서 노론들의 왕세자(영조) 책봉을 반대하였다. 3년(1723)에 우참찬이 되고 4년(1724)에 공 조판서에 올랐다가 영조가 즉위하면서 관직에서 쫒겨났다. 영조 3년(1727) 소론이 다시 등용되는 소위 정미환국때 형조판서로 복직되었고 좌참찬에 이어 4년(1728) 좌찬성에 이르었다. (문과방목, 청선고)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1] 박태항(朴泰恒)
조선시대[1647-1737(인조25-영조13)]의 문신. 자는 사심(士心). 본관은 반남(潘南)임.
박태항(朴泰恒)
1647(인조 25)∼1737(영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세해(世楷)의 아들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郎)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 사서(司書)가 되고,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헌납으로 있을 때에는 궁가(宮家) 절수(折受)의 폐단과 양남(兩南)의 급재(給災)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품02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
본관은?반남(潘南). 자는 사심(士心). 동열(東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濠)이고, 아버지는 세해(世楷)이며, 어머니는 임위(林偉)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통덕랑(通德?)으로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1693년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필선(弼善)·보덕(輔德)·문학 등을 거쳐 1701년 사간원헌납(司諫院憲納)으로 있을 때에는 궁중의 절수(折受 : 공공토지를 떼어서 차지함)의 폐단과 양남(兩南 : 영남과 호남)의 급재(給災 : 재해에 따른 구제책으로서의 물자지급)에 관한 소를 올려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1703년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가 대마도(對馬島)와 교역하는 데 조정에 품의(?議)하지 않고 전결(專決)하였다는 이유로 파직된 바도 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기용, 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 승지·대사간·강원도관찰사·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예조참판으로 승진, 소론의 입장에서 세제(世弟 : 뒤의 영조)책봉을 주장하는 노론을 적극 탄핵하였고, 이듬해 경기도관찰사·형조판서·우참찬·공조판서·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삭탈관직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좌참찬·좌찬성·예조판서·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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