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5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204

자유게시판

독립운동가 박의서 적극적 관심촉구[브레이크뉴스-2012-01-10]

페이지 정보

no_profile 박관우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2-01-16 23:01 조회3,692회 댓글0건

본문

독립운동가 박의서 적극적 관심촉구
 
박관우 국제 칼럼니스트 icon_mail.gif
필자가 잊혀진 독립운동가 발굴을 하게  된 계기는 박의서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0년 족보를 통하여 박의서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한가지 의아스러운 점은 출생한 해는 있는데, 사망한 해도 없고 묘소가 없다는 점이었으나 본격적으로 그의 행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992년이었다.
 
구체적으로 박의서가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것이 하나의 신호탄이 되어 본격적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자료조사를 해도 독립운동가 중에서 박의서라는 이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박의서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박경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독립운동가를 찾게 되었다.
 
여기서 박경순을 주목한 이유는 박의서의 자(字)가 박경순이었기 때문에 본명으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명은 임정 외무부 참사로 활동하였으며, 다른 한명은 만주 신민부에서 활동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필자는 후자(後者)의 박경순에게 깊은 흥미를 느꼈다. 만주에서 활동하였다는 박경순은 "신민부 약사(新民府 略史)"에 의하면 1927년 2월 신민부 본부직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당시 일경과 중국군의 불의의 습격으로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체포된 인물은 김혁 중앙집행위원장 외 10여명이었다.
 
한가지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으니, 박경순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는 기록인데, 문제는 사형과 관련된 기록이 발견이 안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민부의 박경순과 관련하여 주목한 점은 과연 고향이 어디인지 이 부분을 알고 싶었는데, 끝내 관련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박경순의 고향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박의서의 고향이 경기도 연천이었기 때문에 박경순의 고향이  만약에 연천이라면 박의서와 신민부의 박경순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경순의 고향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으나 활동무대가 만주라는 점에 희망을 가지고  2002년 11월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서를 제출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2003년 8월 박의서의 자(字)인 박경순과 신민부 박경순이 동일인 여부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추서가 보류되었다.
 
박의서는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가 독립운동가 발굴을 하는데 있어서 최초의 동기부여를 준 인물이며,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뜻밖에 1993년 4월 박찬오의 판결문을 찾게 되었으며, 이러한 판결문의 발견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2008년 3.1절에 경기중학교에서 박찬오와 함께 항일운동을 하였던 임원빈과 이정순이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이제 올해가 2012년이니 박의서에 대한 독립유공자 신청서를 제출한지 어느 덧 1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도 추서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비통한 심정 금할 길이 없다. 박의서의 가족은 부인과 딸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불행하게도 이 모녀(母女)마저도 현재 행방불명이니 그야말로 한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서대문형무소에 서 사형을 당하였다고 알려진 신민부의 박경순도 현재 후손관계가 전혀 파악이 안되고있으니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끝으로 보훈처가 잊혀진 독립운동가 박의서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줄 것을 촉구한다.
 
*필자/박관우. 국제 칼럼니스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