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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약창공 박엽과, 김성일 그리고 겐소(玄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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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찬문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7-02-13 21:24 조회6,2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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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 갔을때 겐소와 김성일의 비석이 있는곳 을 안내받았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의 영웅대접을 받는 김성일,겐소 왜 우리나라 역사에도 김성일을 영웅취급하는지 일본이 침략할것이라고 보고한 황윤길은 역사에 뭍혀버리고 일본의 간첩을 국왕에게 알현하도록 도운것이 김성일 아닌가. 일본의 침입의 징후를 알면서도 정사 황윤길과 다른 의견으로 임진왜란을 방어하는데 전혀 도움이 못되었던 김성일이 황윤길보다도 더 영웅취급을 받는 우리의 역사는 바로 고쳐져야한다. 김성일이 영웅취급을 받는것은 이황의 수제자이고 학자라는 이유다. 겐소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는 인물이다 겐소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나라 지도를 작성해서 일본이 침략할 때 일본군에 정보를 제공한 첩보원이라는 설이 있다. 겐소는 임진왜란시 소서행장이 이끄는 선봉군에서 우리나라 침입에 향도관 노릇을 하며 소서해장 군대를 우리나라 침입하는데 안내인 역할을 한 첩보원, 외교관 이였다, 약창공은 평안감사 시절 후금에 대한 첩보 활동으로 누르하치가 우리의 땅를 넘보지 못하도를 철통같은 수비를 했으며 약창공이 평안감사시절 6년간은 청나라 장수뿐만 아니라 명나라 장수들도 두려워 했으며 인조가 약창공을 죽이니까 청나라, 명나라에서 모두 좋아했다고 한다. 무속인들도 신으로 모시는 임경업장군이 청나라군사를 못막았는데 약창공이 살아게신 동안은 청나라는 꼼짝을 못하다 약창공이 돌아가신후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키고 말았으며 1636년 병자호란까지 당하고 말았다 어떤사람은 일본의 첩보원을 비호하고도 영웅이고 약창공은 청나라에 대한 첩보활동으로 국방을 든든히 하고도 인조의 쿠테타로 인해 광해군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역사에 뭍혀버리고 말았다. 반남박씨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해야할일은 약창공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에 몰두해야 될일이 아닌가 땅을 찾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찾는것도 중요한일이다. 많은 분들이 광해군의 행적을 올바르게 평가하자는 운동이 있는것 같이 우리도 약창공의 행적을 올바르게 세우는 운동을 했으면 한다. 우리 반남박씨 후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두산동아백과사전 박엽 1570-1623 본관 반남(潘南). 자 숙야(叔夜). 호 국창(菊窓). 1597년(선조 30)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 정언(正言)에 이어 병조정랑 ·직강(直講)·해남현감(海南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방비를 굳건히 하였다.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재직 6년 동안 외침(外侵)을 당하지 않았다.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모독하고도 무사할 만큼 명성을 떨쳤으나, 인조반정 후 처가가 광해군과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1623년 인조반정의 훈신(勳臣)들에 의해 학정(虐政)의 죄를 쓰고 사형당하였다. 괴여만리장성 원래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어 버린다는 뜻이다. 《송서(宋書)》 <단도제전(檀道濟傳)>에 나오는 말인데, 송나라와 위(魏)나라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송나라의 중신인 단도제의 위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아무도 그를 넘보지 못하였다. 권신(權臣)과 왕족들이 이를 시기하여 왕명이라 사칭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할 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건을 내동댕이치며 “너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문단 말이냐(壞汝萬里長城)!” 하고 외쳤다. 과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사람들은 “이제 두려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계속 남쪽을 침범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던 평안감사 박엽(朴燁)을 인조(仁祖)가 죽였을 때 ‘괴여만리장성’이라고 통탄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박엽이 있는 동안은 감히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던 청나라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자주 압록강을 넘어왔고,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청나라의 용골대(龍骨大)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이때 용골대가 “이제 박엽을 죽인 것이 후회되겠지?” 하고 호통을 쳤다 한다. 겐소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하던 중 대륙 침략의 야심을 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아 그 수하로 들어갔다. 1588년(선조 21)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 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修好) 관계를 맺고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 허성(許筬) 등의 통신사 일행이 일본의 실정과 토요토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도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이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과 대치할 때 일본측 고니시의 제의로 이루어진,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 이덕형(李德馨) 등과의 강화회담에 참여하는 등 일본의 전시외교 활동에 종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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