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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수(朴岐壽,) 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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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관리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9-03 20:56 조회5,581회 댓글0건

본문

21세 휘 朴岐壽 1-667 1792--1847 (정조16--헌종13)

응천-동민-환-세성-태원-弼履--사석--윤원--종여--운수--제근--정양

.--준원--유빈박씨

--종경--岐壽 *경상감사;합천갈묘록

--종보--周壽

1792(정조 16)~1847(헌종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봉래(鳳來).

형조판서 준원(準源)의 손자로, 이조판서 종경(宗慶)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덕수이씨(德水李氏)로 군수 술모(述模)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호조판서 종보(宗輔)에게 입양되었으며,? 종조부인 윤원(胤源)의 문인이다.

1810년(순조 10)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하고

181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가 되었다.

그뒤 홍문관부교리․이조참의․대사성․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 등을 거쳐, 1835년(헌종 1)공조판서에 승진하였다. 이어 예조․형조․이조․병조 등 5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지경연․도총관․함경도관찰사․한성부판윤․판의금부사․좌참찬 등을 두루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오르고, 벼슬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1830년 (翼宗)의 빈궁(殯宮)에 불이 났을 때 단신으로 불속에 뛰어들어 진화하였으므로 모두 그 충성심을 칭찬하였다.

그뒤 판의금부사로 있을 때 간신 金弼의 배소를 가까운 곳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양

주의 돈암구사(敦巖舊舍)에 돌아가 산수를 소요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으나 1847년 병조판서에 재기용되었다.

숙부인 좌참찬 종경(宗慶)에게 입양. 1810년(순조 10) 생원이 되고, 181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공조 ·예조 ·병조 ·이조의 판서, 경연지사 ·도총관 ·의금부판사 ·좌참찬 등을 거쳐 돈령부판사에 이르렀다. (두산동아백과)

《박기수(朴岐壽)純祖) 10 (1810) 式年生員)

【합격등위】 2등 0008

【본인문과】 정축(丁丑) 1817 정(庭) *

【부친성명】 박종경(朴宗慶)

【부친품계】 자헌대부(資憲大夫)

【부친관직】 이조(吏曹)/판서(判書)

【생부성명】 박종보(朴宗輔)

【생부품계】 자헌대부(資憲大夫)

【생부관직】 호조(戶曹)/판서(判書)

【안항(형)】 朴周壽)【안항(제)】 朴鎬壽)

純祖16 12/26《춘당대에 나아가 감제를 설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박기수에게 직부전시하도록 하다 춘당대에 나아가서 감제 (柑製)를 설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박기수(朴岐壽)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순조17 10/28 《한림 권점을 행하다 》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였다.【별겸춘추(別兼春秋) 조완진(趙琬鎭)․정기선(鄭基善)․김도희(金道喜)이다.】 3점(點)에는 권돈인(權敦仁)․정지용(鄭知容)․이가우(李嘉愚)․서희순(徐憙淳)․박영원(朴永元)․이헌구(李憲球)*박기수(朴岐壽)등이었다.

순조21 7/21 《홍문록을 행하다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다.【부제학 조종영(趙鍾永)․      응교 이형하(李瀅夏),교리 강세륜(姜世綸)

․      부수찬 이인부(李寅溥)이다.】 3점(三點)을 받은 사람은박영재(朴英載)․이동순(李同 淳)․임정상(任鼎常)․박노수(朴潞壽)․권돈인

(權敦仁)․엄도(嚴燾)․김도희(金道喜)․윤병렬(尹秉烈)․윤심규(尹心圭)․홍승규(洪勝圭)․이인태(李寅泰)․이가우(李嘉愚)․이원묵(李元黙)․서상록(徐相祿)․박기수(朴岐壽)․김대곤(金大坤)․박영원

순조21 11/4 박기수(朴岐壽)를 부교리로,

      22 12/26 약원에서 구두로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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