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판공(參判公) 휘(諱) 세모(世模) 묘갈명(墓碣銘)
페이지 정보
본문
참판공(參判公) 휘(諱) 세모(世模)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諱)는 세모(世模)이고, 자는 여도(汝道)이며, 성은 박씨이다. 시조는 신라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다. 1300여 년이 지나 호장공(戶長公) 응주(應珠)가 지금 나주(羅州)의 옛 반남현(潘南縣)에 살다가 그 땅에 묻힌 뒤, 자손들이 드디어 반남을 본관으로 삼았다. 4세를 내려와 수(秀)는 고려 공민왕 때에 관직이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정계에 진출하였고, 그의 아들인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은 충간(忠諫)을 하다가 우왕에게 화를 입었는데, 본조에 와서 문정(文正)으로 추시(追諡)되었다. 그의 아들 평도공(平度公) 은(訔)은 태종을 도와서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니, 가문이 더욱 번성하였다. 그 후 5세를 지나 사간(司諫) 소(紹)가 중종 때 유명하였는데, 이 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대사헌(大司憲) 응복(應福)은 매우 정성스럽고 신의가 있어 명종과 선조 때 이름이 드러났다. 조부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동열(東說)은 덕과 문장이 뛰어나 세상에서 남곽(南郭)이라 하여 숭상하였으나, 당대에는 곤란을 겪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선고(先考) 호(濠)는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선비(先妣) 평산(平山) 신씨(申氏)는 문정공(文貞公) 흠(欽)의 따님이다.
공은 광해군 2년(1610) 9월 4일에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이미 자질이 뛰어났다. 9세 때에 모친상을 당하여 외조부가 양육하였다. 외조부는 공의 기량을 높게 평가하였으니, 여러 손자들 중에 비할 만한 이가 없었다. 인조 8년 경오년(1630)에 진사에 선발되었다. 을유년(1645)에 세마(洗馬)로 등용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와 아버지를 모셨다. 정해년(1647)에 다시 세마(洗馬)에 서용(敍用)되고, 시직(侍直)과 부솔(副率)로 옮겼다가 파직되었다.
효종 3년(1652)에 다시 내시교관(內侍敎官)으로 임용되었고, 5년인 갑오년(1654) 3월에 효종이 춘당대(春塘臺)에 친림(親臨)하여 문과시(文科試)를 치렀는데, 공이 1등으로 급제하였다. 왕은 공의 글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고, 특히 “오직 소인만이 무사함을 즐기기 때문에 대성인께서는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다.”란 대목을 읽으면서 더욱 칭찬하여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예전에 조부 남곽(南郭) 선생이 선조 27년 갑오년(1594)의 정시(庭試)에서 1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갑오년(1654)에 공이 다시 조부의 경사를 이으니,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겼고 또 그 영광을 부러워하였다.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겼고, 또 정언(正言)과 직강(直講)을 거쳐서 춘방(春坊)으로 들어가 사서(司書)가 되었다. 을미년(1655)에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전임(轉任)되었다가 다시 문학(文學)과 지평(持平)을 거쳤는데, 모두 3번 임명되고 3번 교체되었다. 외직으로 나가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되었다.
병신년(1656)에 또 내직으로 들어와 문학(文學)이 되었다. 여러 번 지평ㆍ정언ㆍ병조정랑ㆍ사예(司藝)ㆍ필선(弼善) 등을 지냈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외직으로 나가 부평부사(富平府使)가 되었는데, 너그럽고 대범하며 대체(大體)를 견지하였다. 자잘하게 따지는 일로 명예를 구하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또 근면하고 삼가며 절검(節儉)을 숭상하니, 백성들이 모두 편안해하였다. 이에 앞서 부평(富平) 백성 중에 상사(上司)의 압력으로 노비를 빼앗긴 자가 있었는데, 관리들이 꺼리고 두려워하여 그 일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공이 부임하자 그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스스로 신원하지 못한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공이 사실을 살펴 노비를 풀어주어 주인에게 돌려보내도록 결단을 내렸다. 상사(上司)가 과연 화를 내며 공의 죄를 캐물었으나, 공은 힘써 분변하여 결코 굽히지 않았다. 정유년(1657)에 겨울에 계모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현종 원년 경자년(1660)에 상복을 입는 기간이 끝나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사간(司諫)이 되었다. 효종이 붕어(崩御)하였을 때 어머니인 장렬왕후(莊烈王后)가 상복을 입는 문제에 대해 1년복으로 결정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3년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그 틈을 타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론(異論)이 마구 일어났는데, 마침 봉서(封書)를 올린 자가 있었다. 공은 장관 이경억(李慶億) 공과 함께 그 간계를 분명하게 논척하다가 체직(遞職)되어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다. 집의(執義)에 배수되고 체직되어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그해 12월에 다시 집의가 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신축년(1661) 3월에는 첨지중추(僉知中樞)가 되었다. 4월에는 우승지(右承旨)로 임명되었다. 7월에는 좌승지(左承旨)로 옮겨 내의부제조(內醫副提調)를 겸임하였다. 8월에 왕세자가 태어나니, 경사에 수고하였다는 명목으로 승진하여 행도승지(行都承旨)에 임명되었다. 임인년(1662) 3월에 체직되어 한성우윤(漢城右尹)이 되었다가 부총관(副摠官)과 동지의금부(同知義禁府)를 겸임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가 되어서는 속주(屬州)의 관리 가운데 직무를 경건히 수행하지 않는 자를 축출하였다. 그 관리는 상당히 신분이 높은 집안사람이라서 교유하는 사람들이 중간에서 풀어 주기를 요구하는 일이 많았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계묘년(1663) 5월에 호조참판이 되었다. 당시 호조판서로 있던 정치화(鄭致和)가 공의 일처리가 주도면밀함을 보고 탄복하며 말하였다. “공이 이처럼 직무를 잘 수행할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공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일처리를 하는 것은 관리들이고, 저는 오직 힘을 실어 주었을 뿐입니다.” 정공은 그의 겸손함을 더욱 칭찬하였다.
갑진년(1664)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다. 가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을사년(1665) 4월에는 왕을 모시고 온천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받아 도성으로 돌아와서 동지돈녕(同知敦寧)에 임명되었다. 또한 경사스런 일에 수고하였다는 명목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병오년(1666) 정월에는 형조참판이, 2월에는 예조참판이 되었다. 봉양하기 위해서 외직을 바라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 전에 예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정미년(1667) 4월에는 또 다시 왕의 온천 행차를 모시고 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해 11월에 부인 안씨가 죽고, 이어서 아버지 첨추공(僉樞公)이 별세하셨다. 공은 슬픔이 지나쳐 상례를 거의 주관하지 못하였고, 병에 걸린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이 날은 12월 26일이었으며, 향년은 58세였다. 조정의 예관(禮官)이 와서 부의를 전하였고, 왕은 공의 부자가 10여일 사이로 연이어 작고하였음을 애통해하며,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상여꾼[人夫]과 쌀ㆍ베 등을 보냈다. 무신년(1668) 5월 24일에 양주(楊州) 풍두산(風頭山) 선영의 동남쪽 건좌(乾坐)의 언덕에 부인 안씨와 합장하였다.
공은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풍채가 훤칠하였다. 기백이 웅건하고 진솔하며 화통하여 소심하게 굴지 않았다. 남들과 교유할 때는 격의 없이 속내를 다 터놓았지만 잘못을 질책할 때에는 가차 없었다. 또한 자신의 몸가짐은 검소하였고, 공무를 처리할 때는 신중하고 부지런하였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재덕(才德)이 선대에 만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는데, 지금 이와 같은 지우(知遇)를 입었으니, 어찌 요행이 아닌가? 오직 근결(勤潔)로써 힘써 노력하여야 우리 조상을 욕되지 않게 하고, 또한 이것으로 보답하는 방도를 삼아야 할 것이다.”
매번 일이 많고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급한 일 때문에 말미를 청한 적이 하루도 없었으며, 피로하고 고생스러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안에서는 재산을 축적하지 않아 남에게 빌려 먹고 살았으며, 타고 다니는 안장도 낡아 도저히 탈 수 없을 정도였다. 서필원(徐必遠)이 해서(海西) 지방을 다스리러 갔다가 새 안장을 사왔다. 그리고 공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놀려댔다. “안장을 고치는 자가 ‘우리 재상의 검소함이 이러하므로 태평한 세상을 기대할 수 있다.’라고 치하하였소. 공의 안장은 치란(治亂)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인가 보오.” 왕실과 혼인을 하게 된 뒤로는 더욱 스스로 삼가서 의장(儀章)과 물채(物采)를 모두 절약하고 줄여 사치함이 없었다.
또한 선을 즐기고 의리를 좋아함은 지성(至誠)에서 나왔다. 사랑과 공경을 다해 부모를 섬겼는데, 계절마다 축수(祝壽)를 올려 기쁘게 해드렸다. 제사에는 청결하게 하여 자신이 몸소 참여하였으며, 종족을 거두어 보살피고 친구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하였다. 서로 교제한 벗으로 재상 홍명하(洪命夏)ㆍ판서 박장원(朴長遠)ㆍ판서 이경징(李慶徵) 형제ㆍ서필원(徐必遠)ㆍ이상진(李尙眞) 같은 이는 모두 당시에 덕망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는 공과 우의가 매우 독실하였으며, 판서 송준길(宋浚吉)은 공을 재상의 풍도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부인 순흥(順興) 안씨(安氏)는 우의정 현(玹)의 5대손인 찰방(察訪) 두원(斗元)의 따님으로, 무신년(1608) 7월 13일에 태어났다. 온순하고 부도(婦道)를 갖추어 시부모를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고, 근면하고 검소하게 집안을 다스려 생계를 잘 꾸려나갔다. 2남을 두었는데 태장(泰長)은 군수(郡守)이고, 태중(泰中)은 일찍 죽었다. 1녀는 군수(郡守) 이세필(李世弼)에게 시집갔다. 측실에 2녀가 있는데, 최진음(崔鎭崟)ㆍ김하평(金夏平)에게 시집갔다.
태장(泰長)의 2남 중 장남 필성(弼成)은 효종의 따님인 숙녕옹주(淑寧翁主)에게 장가들어 금평위(錦平尉)가 되었고, 차남은 필진(弼震)이다. 측실에서 난 아들은 필신(弼臣)이다. 태중(泰中)의 두 아들은 필문(弼文)ㆍ필무(弼武)이다. 이세필(李世弼)의 아내는 4남을 두었는데, 태좌(台佐)는 진사(進士)이고, 다음은 정좌(鼎佐)ㆍ형좌(衡佐)이고, 막내아들은 아직 어리다. 그리고 1녀는 박항한(朴恒漢)에게 시집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야천(冶川)과 남곽(南郭)은
나의 고조와 조부이시고,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께
나는 외손자가 된다네.
내 묘갈을 지은 자를
나는 아우라 부르고,
내 묘갈을 지은 자는
나를 형이라 부르네.
내가 정시(庭試)에서 장원을 하니
3대에 걸쳐 명성이 드러났네.
나는 예조참판을 역임하였고,
또한 도승지도 지냈지.
못된 자와 상대하지 않고 선한 자와 더불며,
태평한 시절에 태어나 태평한 시대에 죽었네.
나보다 뒤에 죽고 나보다 뒤에 태어난 자 가운데
나를 따르려는 자 누구일까?
박세당(朴世堂) 지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