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94
  • 어제1,165
  • 최대1,363
  • 전체 308,393

자유게시판

조선 후기 학자 박세채(朴世采)의 冠,婚,祭의 3禮에 관한[삼례의(三禮儀)

페이지 정보

박창서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5-09 10:23 조회8,221회 댓글0건

본문

조선 후기 학자 박세채(朴世采)의 冠,婚,祭의 3禮에 관한 <삼례의(三禮儀)

 

HOME > 현장경매 > 제 9 회 > 136. 조선 후기 학자 박세채(朴世采)의 冠,婚,祭의 3禮에 관한 <삼례의(三禮儀)> 3권 1책 중간 목판본


off_img01.gif

[ 제 9 회 ] 현장경매 물품의 상세 정보입니다.]
middle_title_right.gif

tb1_top.gif
search_title.gif
tb1_bottom.gif

136. 조선 후기 학자 박세채(朴世采)의 冠,婚,祭의 3禮에 관한 <삼례의(三禮儀)> 3권 1책 중간 목판본
경매번호  9-136 시작가  50,000 원

한옥션경매에서는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서 출품물건에 대한 “예약경매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예약시 예약응찰금액의 20%를 경매 1일전까지 예치하셔야 예약응찰을 하실수 있습니다.

- 입금 계좌 안내 -
[국민은행 962701-01-220478 조현제]
[농협 150103-52-008306 조현제]
[대구은행 028-07-011105-3 조현제]
예약하기


detail_title1.gif

<내용> 조선 후기 학자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冠,婚,祭의 3禮에 관한 <삼례의(三禮儀)> 3권 1책 중간 목판본, 주자의 <家禮>의 근본정신과 행용(行用)에 근거한 여러제도를 상고, 취합한 책으로 저자 사후 16년인 1711년(숙종 37)에 저자의 문인 이세환(瑍)이 의흥현감() 이성곤()에게 부탁하여 간행한 것이다. 권2와 권3 사이에  개장의()가 붙어 있고, 같은 해에 쓴 김간()의 발문이 있다. 상태 양호하다.
<크기> 21× 32cm

<참고>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본관 반남(), 자 화숙(), 호 현석()·남계(), 시호 문순(), 교리()의(猗)의 아들이다. 원두추()의 사위, 김상헌()의 문인이다. 현석은 그가 태어난 한양의 한 지명에서, 남계는 그가 만년에 기거한 파주()의 시내 이름에서 각각 따온 것이다.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주장, 효종의 꾸지람을 받자 과거를 포기하였다. 
  주로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과 학문적 교유관계를 가졌으며, 1659년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기년복()을 주장한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파직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집의(동부승지 등에 등용되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자 윤증(
최석정(崔)·남구만() 등과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94년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좌의정에 올랐다. 소론의 힘으로 좌의정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시비명변() 후의 탕평론()'과 '벽이단()'을 강조하는 노론의 정치·학문적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과 초기의 문인들은 대부분 소론이지만, 죽은 뒤에 김간()·김구() 등 문인 대부분이 노론으로 이탈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숙종 후반에 송시열이 사사()되고 윤증도 출사하지 않자 조정에서 산림학자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서 붕당간의 조정에 힘을 기울여 탕평론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의 탕평론은 선조대에 이이가 주장한 조제보합설(調)을 모범으로 한 것으로서 황극탕평설()로 구체화되었으며,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탕평책을 시행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하였다.
  성리학 이론에 밝았으며, 예학에도 해박하여 《남계예설()》 《삼례의()》 《육례의집()》 등 많은 예학서를 저술하였다. 신라시대부터 당시대까지 학자들의 학통을 기록한 《동유사우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