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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공휘태보묘표(定齋公諱泰輔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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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1-03-21 18:31 조회3,6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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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공휘태보묘표(定齋公諱泰輔墓表)

                                                             윤증(尹拯)

아아! 여기는 반남(潘南) 박태보(朴泰輔)군 사원(士元)의 묘다. 세도(世道)가 내려옴으로부터 선비는 실학(實學)하는 이가 드물고 사람은 실재(實才) 있는 이가 드무니 우리 사원같은 이를 어찌 다시 볼 수 있을까? 만약에 조금이라도 더 살았다면 학문은 가히 중하(重荷)를 지고 원로(遠路)에 이를 것이고 재능은 가히 크게 성취해서 의혹이 없었을 것이니 천신(天神)이 이미 주시고서 이에 중도에 쓰러지게 한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 군은 갑오년(1654)에 나서 어려서부터 총명이 특출하여 박학에 끝이 없고 책을 보면 반드시 그 진의를 연구하여 비록 은미한 말의 깊은 뜻이라도 한번만 보면 분석을 해서 사람들의 생각 밖으로 표출하였다. 글을 쓸 때에는 의리만을 주로해서 한 자도 구차하게 하지 않고 침잠하여 노성해서 스스로의 가법이 있었다.

22세에 진사를 하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바로 아무 죄도 없이 선천(宣川)으로 유배가서는 1년이 넘은 후에야 용서를 받고 돌아왔다. 경신년(1680)에 비로소 옥서호당(玉署湖堂)에 들어가니 당시의 수재들로는 앞설 자가 없었다. 군은 사람됨이 강과(剛果)하고 명쾌해서 일을 만나면 바로 나아가서 돌리지 않았으므로 그 때문에 또한 당시에 용납되지 않았다. 군이 또한 외직을 구해서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간지 5년이나 되어 전랑(銓郞)을 거처 응교(應敎)로 승진하였으나 또한 한가로이 보양하기를 구해서 파주(坡州)로 나갔는데 그 이듬해가 기사년(1665)이었다. 왕이 중궁(中宮)을 바꾸려 할 때 군은 사직하고 집에 있어서 여러 선비와 더불어 상소를 하고 간언을 하다가 바로 기휘(忌諱)에 저촉되었다. 형장을 설치하여 군을 국문하는데 몸소 나서서 스스로 당하니 이미 준비된 형구의 고문이라 혈육이 벗겨지고 문드러져도 사기(辭氣)가 끊이질 않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애통하고 비장하게 여겼다. 이르러 진도(珍島)로 유배를 가는데 노량진 강가에서 돌아가시니 그해 5월 5일이었다.

옛적 노소재(盧蘇齋)의 강주천(康舟川)의 묘문에 ‘앙천퇴흉(仰天槌胸) 천추만추(千椎萬椎)-하늘을 우러러 가슴을 치는데 천번 만번이다’란 말이 있는데 이를 읽을 때 매양 그것이 야만에 가깝고 의심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것은 지극히 아픈데도 자각하지 못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군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왕은 자못 후회를 하고 복관을 명하였으니 6년을 지난 갑술년(1694)이다. 왕이 크게 뉘우쳐서 중관위(中官位)를 복직시키고 정경(正卿)으로 증작(贈爵)하여 제사를 내리고 하고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충혼을 위안하였다. 시절이 바뀌어 왕의 은택이 저승에 까지 미쳤으나 그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애통하고도 애통하도다. 군은 식견과 사려가 심원하며 논의가 강절(剛切)하고 충후(忠厚)하였다. 그가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문묘(文廟)에 승출(陞黜)하는 의론을 할 때는 말하되 ‘겸읍(謙挹)하는 덕을 높이고 신중히 하는 도를 지켜서 임금의 편벽한 바를 바루고 도우라’고 했으니 군주를 바르게 하는 대의를 깊이 얻은 것이다. 일찍이 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호남의 한 지역에 관이 장사하는 폐단가 있어 중외(中外)에서 이익을 도모함이 망국의 조짐임을 보고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맹자의 의(義)와 이(利)의 분변에 합치된 것이다.

나는 이런 두 가지에서 항상 심복했으니 이와 같은 견식과 의론은 세상에서 그 비할 바가 적은 것이다. 만약 죽지만 않았다면 성조(聖朝)에서 반드시 등용되었겠으나 이제는 할 수가 없으니 이는 후세에 군을 아는 자로 하여금 공원노(孔原魯-송대 공도보(孔道輔)의 자니 관직은 운주지(鄆州知))와 추지완(鄒志完-宋代 정호(鄒浩)의 자니 관직은 우정언(右正言))-위의 두 사람은 관작을 삭탈 당했다가 후세에 복직된 인물)-의 절조에 불과하게 할 따름이다. 슬프도다! 군의 신명(身命)이어 시운(時運)이 불행하였다. 고인이 상천에 호소해도 소용이 없던 것은 어찌 악무목(岳武穆-송대 악비(岳飛)의 시호나 후에 충무(忠武)라고 시호를 바꿨는데 금악(金岳)을 격파하고 주선진(朱仙鎭)으로 진군할 때 진회(秦檜)가 화의를 주창해서 모함하여 처형당했음)뿐이리오. 정묘년(1687)에 우리 선친이 모함을 당했을 때 여러 문인들이 진정서(陳情書)를 내려고 하였는데 군이 기초를 하여 사림에서 칭찬하였다. 그 외에도 세도(世道)에 관계된 문자가 매우 많아 문집 약간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으니 후세에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군의 호는 정재(定齋)니 그 선계(先系)는 나주인(羅州人)이다. 고려말에는 문정공(文正公) 상충(尙衷)이 계셨고, 우리 중종조에는 사간(司諫) 소(紹)가 계셨으니 모두 정학(正學)의 대절(大節)로 당시에 박해를 받았는데 군도 그와 같으나 불행하게도 더욱 심한 것이다. 증조부의 휘는 동선(東善)이니 참찬(叅贊)으로 시호는 문헌공(貞憲公)이고, 조부의 휘는 정(炡)이니 참판(叅判)으로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아버지의 휘는 세당(世堂)이니 현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고 어머니는 의령 남씨니 현령 일성(一星)의 딸이다. 판추공(判樞公) 숙형(叔兄)의 휘는 세후(世垕)니 일찍 죽어 군이 그를 대신하여 입후하니 양어머니는 파평 윤씨로 바로 나의 누나이다. 군은 효성이 지성에서 나와 양어머니를 섬기는데 친의(親意)를 받들어 즐겁게 봉양하였으니 비록 친아들인들 어찌 그보다 더 할까. 옛적에 우리 맏고모는 현숙했으나 일찍 홀로 되어 이민적(李敏迪) 공을 양자로 하여 어머니의 정과 효성이 서로 독실하니 사람들은 우리 고모는 덕이 있어도 명(命)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착한 아들을 주셨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한 집안에 우리 누나도 또한 그러하다고 칭한 즉 우리집에서만 아는 바이고 사람들은 혹 모르는 이도 있다. 그런데 우리 누나는 노래에 또한 군을 여의고 그의 복을 다 받지 못하였으니 우리 고모의 운명보다도 더욱 박한 것이다.

아아! 슬프기도 하다! 군은 상공 이후원(李厚源)의 딸과 결혼하여 2남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고 오직 1녀만 있다. 사추공(司樞公)이 또한 군의 형이자 지평(持平)인 태유(泰維)의 작은 아들 필모(弼謨)를 군의 후사로 하고 또한 이에 군의 묘표(墓表)를 지으라고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저의 일생은 비록 짧아도 오히려 전할 것이 없지는 않으니 원컨데 그것을 기록해서 하여금 영원히 민몰되지 않게 해주시오.’고 하였고 군의 친구 남학명(南鶴鳴) 군이 또한 그가 쓴 행상 한 통을 내게 보이니 나는 늙고 병들어 혼색(昏塞)하여 문장도 족히 오래도록 전할 수가 없으나 군의 한 바 행적 같은 것을 어찌 사람을 대하여 말함에 기휘(忌諱)할 바가 있으리오. 다만 그의 대강만을 추려서 위와 같이 서술해서 후세인으로 하여금 이 사람의 묘인 줄만 알게 할 뿐이다.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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