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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약창공 휘 엽(燁)과 평양 대동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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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nampark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1-03-14 10:53 조회5,1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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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창공 휘 엽(燁)과 평양 대동문 현판

<나의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지음> 40쪽

김일성 광장에서 민속박물관을 끼고 돌면 바로 대동강변 산책길이 나온다. 강변엔 해묵은 가로수가 짙게 그늘을 만들어 한낮인데도 어둠이 느껴진다. 문자 그대로 녹음(綠陰)이 장관인데 왠지 길이 눈에 익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 텔레비전의 '남북의 창', '북한은 지금' 같은 프로에서 대동강변 풍경으로 비친 것이 대개 여기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동문은 우리 나라 여느 성문과 마찬가지로 반월형 무지개문을 낸 석축 위에 목조 건축의 누각을 얹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워낙 국방상 요충인지라 축대 위 성벽에나 설치하는 성가퀴(女墻) 를 두르고 쏘는 구멍까지 내 전시 대비체제를 갖춰 놓은 점이다.

나는 우선 대동문 정면을 보고 싶었다. 출입문에 앞뒤가 있겠느냐 싶지만 문의 정면이란 대동강 쪽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다. 옛날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평안감사 능라도 연회도>를 보면 대동문에 대동문. 대동문. 대동문 하고 세 번이나 현판을 그려 넣은 것이 퍽 인상적이어서 그것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돼 있었다. 하나는 무지개문 머릿돌에 음각으로 새겼고, 문루 1층엔 희대의 낭만적 묵객(墨客)이었다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그 활달한 초서 현판이, 그리고 2층엔 청나라와의 전쟁 때 첩보 작전에 능했다는 평안감사 박엽(朴燁)이 쓴 방정한 해서(楷書) 현판이 걸려 있다.


壞汝萬里長城

원래 스스로 만리장성을 허물어 버린다는 뜻이다. 《송서(宋書)》 <단도제전(檀道濟傳)>에 나오는 말인데, 송나라와 위(魏)나라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송나라의 중신인 단도제의 위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아무도 그를 넘보지 못하였다. 권신(權臣)과 왕족들이 이를 시기하여 왕명이라 사칭하고 그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할 때 그는 머리에 쓰고 있던 건을 내동댕이치며 “너의 만리장성을 스스로 허문단 말이냐(壞汝萬里長城)!” 하고 외쳤다. 과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위나라 사람들은 “이제 두려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하며 계속 남쪽을 침범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던 평안감사 박엽(朴燁)을 인조(仁祖)가 죽였을 때 ‘괴여만리장성’이라고 통탄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박엽이 있는 동안은 감히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던 청나라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자주 압록강을 넘어왔고,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청나라의 용골대(龍骨大)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이때 용골대가 “이제 박엽을 죽인 것이 후회되겠지?” 하고 호통을 쳤다 한다.

[출처] 괴여만리장성 [壞汝萬里長城 ] | 네이버 백과사전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231쪽

평안감사에 무장 박엽을 임명하여 대포를 주조케하는등 전쟁에 대비하던 광해군



<조선왕조사> 542쪽

전날의 세도가들로 유희분 이이첨 정인홍 朴燁 정준 등 서인의 미움을 샀던자 수백여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던 평안감사 박엽을 인조가 죽였을 때 “괴여만리장성”이라고 통탄한 사람이 있었다. 과연 박엽이 있는 동안은 감히 압록강을 건너오지 못하던 청나라가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자주 압록강을 넘어왓고,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는 청나라의 용골대 앞에 무릅을 꿇는 치욕을 당해애만 했다.

이때 용골대가 “이제 박엽을 죽인 것이 후회되겠지?” 하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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