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충의(三世忠義)비명(碑銘) (족보 10권 세적편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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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6-03-26 11:36 조회1,806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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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충의(三世忠義)비명(碑銘) (족보 10권 세적편 99쪽)
시전의 비풍장 하천장의 시는 이 모두가 어지러운 세상에서 태평성세를 사모하여 부른 노래다.
나는 이 시를 빌어 반남박씨 충의 삼세로 이제 비를 세움에 다시 말하노니 이 일은 국가의 큰 기쁜 소식의 하나로다
박공 도소제의 휘는 힐(詰)이니 호장공 응주는 그 6세조이시고 사온 직장공 상경(尙?)은 그의 아버지이시고 반남선생 상충(尙衷)은 그 백부로서 훌륭한 벼슬과 높은 도덕이 이 나라의 이름난 가문일러라.
공은 일찍이 급제하시고 문장과 도덕이 세상에 높이 쓰임직 하되 은거하시어 뜻을 구하시고 시대가 좋아지기를 기다리시다가 고려가 망하매 공의 의를 고려 옛 나라에 바치시고 새 나라에는 절대로 따르지 않으려 하시니.그 시대 사람들이 중국의 충신 백이나 노 중년 같으신 충신이라고 칭송이 자자했고.
태종이 등극하시기 전에 서로 친교가 있어 수차 부르시고 또 제용감 벼슬을 제수하시고 주택을 내리시되 아무도 몰래 훌쩍 남으로 달아나시어 금산 두메에 사시니 또한 엄자룡 같으신 충신이라 하더라.그 충의는 삼은(목은 이색.포은 정몽주.야은 길재)의 충의와 같으시나 세상에 쓰이지 않고 소원해져서 세상 드러냄에 더욱 어려웠더라. 충효미풍을 세우시어 후 백세 강상이 일월과 같이 밝건 늘 오늘날 친신이나 세신 된 자들이 임금을 배반하고 이 나라를 팔아먹고 못할 일이 없이 저희 마음대로 하는 자들아 너희들만은 무슨 마음보들이냐
그 증손 인(麟)은 호는 의율제로 선대의 미풍을 이어받아서 충의 치킴을 일과로 하시고 노시기를 남추강과 원관란과 같이 하시어 도의로 사귀고 일찍이 벼슬에 오르시어 여러 골을 역임하시니 가시는 곳마다 치적이 높으시어 칭송이 자자했고 단종 초에 명을 받아 진산에 계시다가
을해 후에 인끈을 던지시고 장차 영월로 가시려 하시니 아들 임회선생이 같이 가려고
하다가 모친이 늙으시고 또 병으로 위독하시어 그 길로 자취를 감추시고 고기잡이와 나무하기로 일을 삼으시고 달 밝고 바람 맑을 때마다 문득 어제 자규시를 읊으며 북망통곡 하시고 죽으려고까지 하시고 후원에 단을 모으시고
매년 10월 24일 슬피 우시며 제사 하시니 그 충의는 육신의 충의와 같으시나 그 처지가 같지 않으시고 만나온 바가 다르셨으나 그 충절을 지키신 의도는 차별 할 수 없더라.
후세에 인사들이 팽택령 도연명이 벼슬을 버리고 율리에 돌아와서 숨어살던 절개와 비긴다는 뜻에서 그 충절을 세상에 들어내고자 의율 이라고 사사이 시호를 드린 것은 대중 공론이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 감을 볼 수 있더라.
임희공(任淮공=希權)은 일찍이 가훈을 이어 받아서 배움에 근본이 있고 성리학을 연구하시었으며,
충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본받았고 을해년에 아버지를 따라서 진산에 계시더니 영월의 비보를 들으시고 아버지의 퇴관 결심을 찬성하시고 아버지를 모시고 영월로 가시려 했으나 대개 그 부자 분의 사람은 두분 이시고 결의는 하나이더라.
병공이 특히 별록을 써 말하시기를 대개 옳지 못한 일을 하면서 그 비중을 무겁게 하고 이름을 도용해서 세상을 속이고 이 누를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였으니 그런 간계를 어찌 은폐하겠는가 하시었으매. 대개 그 의를 보심이 이와 같이 밝으시므로
양녕대군을 변명하심이 이와 같음이라.
문절공 유미암(휘 유휘춘) 선생이 그 행장을 기록하시어 말씀하시기를 충과 효가 세상에서 뛰어나시고 그 배움에는 근본이 있으므로 부모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하시고 우애가 지극했으며 아버지 병환에 손가락 피로 그 명을 연장시키시고 상을 당하매 그동안 미음만 마시고 제자들과 그만 배우고 외우시니 산골 풍속이 크게 달라져서 산촌 서당에 글 외 오는 소리와 풍악소리가 들리고 고을에는 예양의 미풍이 높아지니 고을 사람들이 계시는 집을 선생님 댁이라고 그 마을을 효자동이라고 했으니 그 마음은 육신에 비하여 아무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하시고 문헌공 이초려 선생이 그 사적을 기록하시되 간단히 말씀하시기를 남기신 문학이나 끼치신 미풍이 넉넉히 후 백세를 권면 했으니 남추강(남효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나 원관란(원호; 생육신의 한사람 시호 정간)과 같으신 분이라 하시고 박정승 종악이 그 남기신 유적을 쓰시며 말씀하시기를 그 배움은 정심과 수심으로 근본을 삼고 그 글은 성현의 글을 귀하게 여기시니 흉년에 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되 서로 경계하여 그 동리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군자동이라고 하였다 하시고,
순조대왕 임신 년에 사림이 무주 도산에 사당을 세워 제주공 송금곡 선생이 이에 기록하시기! 그 아버지 진산공이 장릉말에 벼슬을 버리시고 금산으로 달아나시매 공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 벼슬을 않기로 단념하시고 숨어사시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시어 깨끗이 살으셨으니 그 마음은 육신에 부끄러움이 없다하시고 문경공 임전재 선생이 지덕지를 쓰시되 간추려 말씀하시기를 박공은 단묘 충신이시라 하시고 또 그 책 근안주에 임회는 처사 박공의 당호로 남추강이나 김매월(김시습; 영월 육신사에 배향)과 같은 충신이라 하시고 증공 노송지년과 김공 평재감이 찬송하시어 전후의 공평이 이와 같으니 그 공적이 더욱 빛나더라.
금산 유림이 본 손들과 뜻을 같이하여 비를 세우려 하며 이르기를 금산고을은 옛 현인의 비가 많이 서서 빛나는데 이제 박씨의 삼세는 인륜 가르치심에 공이 많으시고 그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할 자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비를 세우기로 하여 여러 선비들이 나에게 비문을 청탁하는데 우만은 늙고 병들어 글을 놓은 지가 이미 오래지만 생각하니 오늘의 이일만은 하늘이 나에게 그 옳음을 가르치시므로 국가를 위하여 대단히 기쁜 소식이니 찬축함을 견디지 못하여 힘을 다하여 이 비문을 씀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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