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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동 별고개(성현)와 박촌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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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춘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8-28 12:42 조회5,931회 댓글0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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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동 별고개(성현)와 박촌 마을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연혁>

만수동은 인천부 조동면과 남촌면에 걸쳐 있던 지역으로

1914 3 1일 부천군이 신설되고 4 1일 남동면이 신설될 때 새말, 구룡골, 산밑말,

담뱅이, 장승배기,새골, 비리고개, 돌골, 쇠판을 병합하여 만수리로 했다.

1940년 인천부로 다시 편입되고, 만주정이 되었다가

1946년 만수동이 되었다.

1968년 구제 실시에 따라 인천시 남구 만수동으로 개칭되고,

1988년 남동구가 신설되면서 남동구에 편입

만수동의 옛날 이름에는 새말, 구룡골, 산밑말, 담뱅이말, 장승배기, 새골, 비리고개, 돌골, 쇠판 등이 있다.

▶ 별고개(성현)와 박촌 마을

조선 인조(임오년) 1642년 중국 사신이 서울에 특사로 왔다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조선공주와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사신은 공주와 결혼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할 날이 되어 서로 이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신이 한양에서 새벽에 귀국길에 올라 본산(현 수산동) 뱃터에서 중국가는 배

를 타려고 할 때, 궁궐밖을 나갈 수 없는 공주가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중국사신을 따라가려 하였으나 나라

의 법이 엄하여 눈물을 흘리며 별래현까지 특사를 배웅하였다.이 두사람이 이 고개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

별하게 되어 이 곳을 별류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후 별류현이 별고개, 성현, 박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별고개에 대한 또 다른 유래는 이 고개를 비류가 넘어 문학산에 미추홀 왕국을 세웠다고 해서 '비류고개'

고도 하며 백제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가족과 이별한 고개라 하여 '별이고개'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곳에 1600년경 반남 박씨의 14대손이 살기 시작하여 박촌마을이라고 일겉기도 하였다. 1913년 경인국

도가 생긴 이후 별고개가 거의 이용되지 않다가 1987년 대단위의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옛 정취를 찾

아볼수 없게 되었다. 현재 박촌 마을은 없어지고 향촌부락으로 개칭되어 철거민들과 일부의 박씨들이 주공

아파트 뒤편에서 살고 있다. <인천시 홈페이지>

<< 만수동 박촌 마을 가계도, 세양공후 부정공파 >>

1세 응주 應珠 시조 호장공 → 2세 의 宜 급제공 → 3세 윤무 允茂 참의공 → 4세 수 秀 밀직공 →

5세 상충 尙衷 문정공 → 6세 은 訔평도공 → 7세 강 薑 세양공 → 8세 륜 부정공 →

9세 훈 塤 → 10세 겸 謙 → 11세 간 竿 → 12세 정순 正淳 → 13세 경 璟 →

만수동 입향조

14세 정걸 廷傑 - 15세 세도 世道

세덕 世德

세인 世仁 → 16세 태온 泰溫 → 17세 필조 弼祚 --→ 만수동

세의 世義 --→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 경신마을

1987년 까지 만수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었지만, 대단위 주공아파트 단지 건설로 뿔뿔이 흩어지기

는 하였지만 그나마 남동구 만수동 주변 수산동 경신마을에 새로이 자리를 마련하고 매년 음력 10 5

시제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1. 일시 : 10 5

2. 장소 :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 경신마을

3. : 14세 정걸(廷傑) 15세 세인(世仁)/ 세의(世義) 16세 태온(泰溫) 17세 필조(弼祚

 

위글 출처 다음카펴 반남박씨족보에서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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