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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열東說남곽공파甲1

페이지 정보

박춘서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8-10 23:32 조회3,991회 댓글0건

본문

동열東說남곽공파甲1

13

1-17

호 봉촌.남곽.

거 주 지

출 생

년 월 일

1564.

사 망 년 월 일 1622.7.

관 직 갑과. 대사성.예조참의.

행 적

13世 東說(동열)3자2녀

자 說之(열지) 호 南郭(남곽) 또는鳳村(봉촌)

明宗19년(1564)生,

宣祖18년(1585)進士,

宣祖27년(1594)文科壯元及第,

官 歷 銓郞 至 通政 成均館大司成 光海14년(1622) 7월 3일卒,

贈 吏曹參判 遺集1卷 與季弟梧窓公遺集合刊,

○配 貞夫人高 靈申氏 父 同樞 贈判書撥 祖 郡守 贈參判如柱 外祖 海平尹義衡, 壬戌明宗17년(1562)生 孝宗4년 癸巳(1653)5월30일卒 壽92.

○墓 在靈巖纛峴未坐原 申氏墓在下 有表石 宗孫世采撰陰記又有 神道碑象村申欽撰 曾孫泰維書 老峰閔鼎重篆 淸陰 金尙憲撰誌 季弟 東亮撰狀.

홈 > 역사와 인물 > 과거합격자

박동열(朴東說)

선조(宣祖) 27년 (갑오, 1594년), 정시(庭試) 갑과1(甲科1)

인적사항

생년(生年) 갑자1564(甲子1564)

자(字) 열지(說之)

호(號) 남곽(南郭)

본관(本貫) 반남(潘南)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박응복(朴應福)

조부(祖父) 박소(朴紹)

증조부(曾祖父) 박조년(朴兆年)

외조부(外祖父) 임구령(林九齡)

처부(妻父) 신벌(申?)

제(弟) 박동량(朴東亮)

손(孫) 박세모(朴世模)

자(子) 박황(朴潢)

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1585(을유)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대사성(大司成)

박동열(朴東說) 시대 조선 생몰년 1564-1622(명종19-광해군14) 본관 반남(潘南)

자 열지(說之) 호 남곽(南郭)/봉촌(鳳村) 시호 활동분야 문신

박동열(朴東說)

1564(명종 19)∼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열지(說之), 호는 남곽(南郭)·봉촌(鳳村). 사간 소(紹)의 손자로, 대사헌 응복(應福)의 아들이며, 동량(東亮)의 형이다.

다섯살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1585년(선조 18)진사가 되었으며 1594년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이 제수되었고, 이어 정언·병조좌랑·사서 등을 지냈다.

1601년 홍문관의 수찬·교리를 거쳐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그해 가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의주(義州)에 다녀왔다.

1603년 검상(檢詳)·사인(舍人)을 거쳐 사성(司成)·상례(相禮)·통례(通禮)를 역임하고, 뒤에 황주목사로 나가 부역(賦役)을 고르게 하고 민폐를 없애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어사(御使)의 추천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606년 예조참의·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에 올랐다.

그뒤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충주목사가 되고 이어서 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하자, 이에 분격한 유생들이 정인홍의 유적(儒籍)을 삭제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말을 듣고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유생들을 투옥시킬 때, 이를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진하여 나주목사로 나아갔다. 나주는 원래 다스리기 어려운 고장이었으나, 그는 유풍(儒風)으로 잘 다스렸다.

1613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 동량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마침 중풍으로 석방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였고,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및 국조의 고사에 두루 통하였다.

만년에 송추(松楸)에 폐거(廢居)할 때 이항복(李恒福)과 자주 내왕하였다.

저서에 《봉촌집》이 있다.

제목 : 남곽공에 대한 추가자료

<조선왕조실록에 있는자료>

선조27 2/29 유생에게 정시(庭試)를 베풀어 박동열(朴東說) 등 15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壯元)

선조27 5/14 정언 박동열(朴東說)

선조29 3/17 함경도 순안 어사(咸鏡道巡按御史) 박동열(朴東說)이 장계하기를,

“남도(南道)의 걱정이 하루가 긴박한데,

선조29 6/25 박동열(朴東說)을【기국(器局)이 얕고 좁다.】 지중추부사로,

선조33 9/13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수찬으로

선조33 9/19 박동망(朴東望)을 사헌부 지평으로【사람됨이 용렬하여 대간에 합당하지 않았다】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부교리로 (박동망=박동렬의 아우)

선조33 11/19 비변사가 유장(儒將) 유공신(柳拱辰) 등 16인을 천거하였다.【박동열(朴東說)·

선조33 12/24 왕세자가 겸사서(兼司書) 박동열(朴東說)을 보내어 문안하니,

선조34 2/29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교리로

선조34 3/16 홍문관이【교리 ·박동열(朴東說), .】 아뢰기를,

선조34 3/19 조강이 있었다. 상이 전에 수강한 것을 한 번 읽고, 시독관(侍讀官) 박동열(朴東說)‘상왈산하유 화(象曰山下有火)’에서부터 ‘수능능지호(誰能陵之乎)’까지 강하였다. 상이 새로 수강한 것을 한 번 읽 고 나서 이르기를,“산하유화괘(山下有火卦)에 어찌하여 절옥(折獄)을 말하였는가?” 하니, 박동열이 아뢰기를,“비괘(賁卦)는 바로 과병(戈兵)의 상(象)으로 살벌(殺伐)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절옥을 말한 것입니다.”

선조34 4/24 박엽(朴燁)을 사간원 정언으로, 박동열(朴東說)을 이조 좌랑으로,

선조43 8/11 박동열(朴東說)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선조34 8/20 강을 마치자 지평 박동열(朴東說)이 나아가 아뢰기를,

선조34 8/23 박동열(朴東說)을 홍문관 교리로

선조34 9/6 박동열(朴東說)을 이조 정랑으로

선조34 11/5 .여러 고을의 영위사(迎慰使)를 차출하였는데, 박동열(朴東說)을 원접사 종사관으로 삼았다.

선조35 3/17 박동열(朴東說)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범용(凡庸)하였다.】

선조35 4/1 박동열(朴東說)을 사예(司藝)로

선조35 4/20 지제교 성균관 사예 박동열(朴東說)이 지은 것이었다.

선조35 9/28 별문사 낭청(別問事郞廳) 박동열(朴東說) 에게 각 숙마 1필 씩에다 승서(陞여)하고

선조36 2/16 박동열(朴東說)을 의정부 사인으로

선조36 7/27 박동열(朴東說)을 황주 목사(黃州牧使)로 삼았다.

선조37 10/1 황해도 어사(黃海道御史) 오백령(吳百齡)이 서계하였다.

“(信川郡守) 박동망(朴東望)은 자신의 생활은 검소하게 하고 백성 사랑하기를 자상하게 하였습니다.

(黃州牧使) 박동열(朴東說)은 마음을 다해 고을을 다스렸으므로 온갖 폐단이 모두일신 되었습니다.

선조37 10/1 박동열(朴東說)에게는 각기 표리(表裏)를 하사하라.”

선조39 3/7 황해도 암행 어사 윤효선(尹孝先)이 아뢰었다.

“황주 목사(黃州牧使) 박동열(朴東說)은 정치에 근실하고 부역이 평등하여 임기가 차서 떠날적에 백성들 이 더 유임하여 주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조39 8/25 박동열(朴東說)을 동부승지로,

선조40 7/19 박동열(朴東說)을【문예(文藝)로 진출하였다.】 예조 참의로,

허균(許筠)을【경박하여 자제하는 일이 없었다.】 내자시 정으로,

선조40 9/24 박동도(朴東燾)를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박동열(朴東說)을 황해도 관찰사로,

선수27 2/1 정시(庭試)에서 박동열(朴東說) 등 13인을 뽑았다.

선수34 10/1 이조 정랑 박동열(朴東說)

선수36 2/1 박동열(朴東說)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삼았다. 사람됨이 무게가 있고 순후하여 일찍이 서로 다투거나 편당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실록》에는 ‘어진이를 해치고 분풀이를 하였다.’고 배척하였으니, 기사(記事)의 공정치 못함이 심하다.

광해0 8/13 박동열(朴東說)을 형조 참의

광해0/9/20 박동열(朴東說)을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광해3 2/19 박동열(朴東說)을 대사성으로

광해3 7/18 박동열(朴東說)을 예조 참의로

광해3 7/30 박동열(朴東說)을 나주 목사로

광해5 6/29 왕이 몸소 국문하였다. 박동열의 원정을 받았다.【나주 목사였는데 붙잡아 왔다.】그가 공초하기를,“신은 선 왕비의 외가붙이로서 집안 대대로 근신하여 지켜 왔으며 또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서 사람들과 사 귀며 놀지 않았는데, 이는 온 조정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김제남과 같이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범연히 서로 알 뿐이고 본디부터 절친하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미년 겨울 무렵에 유릉에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는데, 박동량의 공초와 대략 같았다. 또 말하기를,“김응벽을 처음에 나주에 가두어 두었을 때에 그가 술을 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고, 그가머물러 있기를 원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필시 이로 인해 혐의를 샀을 것입니다.”

하였다. 박동열을 붙잡아 왔을 때에 중풍에 걸렸는데, 대궐의 뜰에 끌고 나와 공초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얼굴색이 변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상이 치료하라 명하고 이어 방면하라고 명하였다.

<사마방목 에 진사시 합격한자료>

《박동열(朴東說) / 宣祖 18 式年 進士 》

【시험년도】 선조(宣祖) 18 (1585)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60

【본인성명】 박동열(朴東說)

【본인 자】 열지(說之)

【본인생년】 갑자(甲子) 1564

【본인본관】 나주(羅州) 박(朴)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갑오(甲午) 1594 정(庭) *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박응복(朴應福)

【부친관직】 병조(兵曹)/참지(參知)

<조선조방목>

박동열(朴東說) More Info.

선조(宣祖)27년(1594년), 정시(庭試) 갑과1(甲科1) :갑과1 은 장원을 뜻함

생년(生年) 1564년, 갑자

자(字) 열지(說之)

호(號) 남곽(南郭)

본관(本貫) 반남(潘南)

부(父) 박응복(朴應福)

조부(祖父) 박소(朴紹)

증조부(曾祖父) 박조년(朴兆年)

외조부(外祖父) 임구령(林九齡)

처부(妻父) 신벌(申<벌0x6276>)

자(子) 박황(朴潢)

제(弟) 박동량(朴東亮)

손(孫) 박세모(朴世模)

소과(小科) 1585(을유)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대사성(大司成), 홍문관/리(弘文館/吏

◎ 박동열(朴東說)

《박동열(朴東說) / 宣祖 18 式年 進士 》

【합격등위】 3등 0060

【본인성명】 박동열(朴東說)

【본인 자】 열지(說之)

【본인생년】 갑자(甲子) 1564

【본인본관】 반남 박(朴)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갑오(甲午) 1594 정(庭) *

【본인전력】 유학(幼學)

【부친성명】 박응복(朴應福)

【부친관직】 병조(兵曹)/참지(參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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