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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서원(龜湖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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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6-06 12:14 조회4,6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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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의 숨결을 찾아서(37) - 구호서원(龜湖書院)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지켜온

소중한 문화유산

봉동읍 구미리에 위치한 구호서원.

구호서원이 위치한 구미리(九尾里)는 원래 구미리(龜尾里)라 표기했다고 한다. 구미리는 이 마을의 뒷산이 거북이의 꼬리와 같은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으로 정동(井洞), 서중(鼠中), 상구미(上龜尾), 하구미(下龜尾)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상구미(上龜尾)는 ‘귀미란’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귀미란은 귀미의 안동네라는 의미로 귀미(구미)안 이 귀미란으로 바꾸어진 듯하며, 최근에는 상구미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하구미(下龜尾)는 상구미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으로 이 마을 안에 구호서원이 위치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영조 6년인 173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었다.

그러다 1777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98년에 유림과 후손들에 의해 다시한번 중건됐다.

구호서원을 중건하면서 유림과 후손들은 이곳에 처음 모셔왔던 박상충, 이성중, 박은, 송유저, 임사수, 박소 등 5명의 신위(神位)를 다시 봉안했다고 한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고, 유림과 후손들은 이듬해에 구호서원이 있던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백산단(柏山壇)이라 명명한 후 서원을 지켰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1904년에 구호단(龜湖壇)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박종열(朴宗說)·임치우(林致愚)·유기섭(柳基燮) 등을 추가로 배향했으며, 지난 1970년에 사당(詞堂)복원과 함께 구호서원이라 명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상충 선생은 공민왕 때 그는 문과에 급제해 예조정랑(禮曹正郞)의 벼슬을 지냈고 우리나라의 제사를 지내는 법식을 정리했으며, 이성중 선생은 조선을 개국할 때 이성계를 도운 공으로 그에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의 작위가 주어졌다고 한다.

박은 선생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운 공로로 좌명공신(佐命功臣) 삼등(三等)의 작위를 받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그 뒤 그에게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송유저 선생은 문하시중 보문각 대제학(門下侍中寶文閣大提學)을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자 완주로 낙향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울분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후에 그는 인의군(仁義君)에 봉해졌다.

임사수 선생은 단종의 복위 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게 되자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완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또 박소 선생은 조광조 등의 신진 선비들과 함께 사랑과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을 실현하는데 노력했으며, 박종설 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고 후학들을 모아 가르치는 데만 전념했다.

임치우 선생은 유교 경전과 역사에 정통해 많은 선비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며, 유기섭 선생은 효행(孝行)이 뛰어나 주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고, 그의 뛰어난 효행으로 말미암아 국왕으로부터 정여(旌閭)의 은전(恩典)을 받았다고 한다.

구호서원은 봉동읍에서 삼례읍 방향으로 4km정도 가면 길 오른편으로 상구미 마을에 진입할 수 있고 멀리 서원이 자리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원은 마을 안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도착하니 반남박씨 선친의 덕과 넋을 기르고 구호서원을 지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어진 은행나무가 먼저 손님을 맞이한다.

한눈에 봐도 수령이 수백년은 되어 보이는 이 은행나무는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서원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믿고 있다.

구호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와 4칸의 백산재(柏山齋), 내신문(內神門)·모현문(慕賢門)·협문(夾門)·입덕문(入德門) 등이 있었다.

사우의 중앙에는 박상충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오른쪽에는 박은·임사수·박종열·유기섭, 왼쪽에는 이성중·성유저·박소·임치우의 순으로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림들과 후손들은 매년 음력 3월 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태호 기자

창백집(蒼栢集) 해제

조선 후기의 학자 박종열(朴宗說)의 시문집. 7권 2책. 목활자본. 1923년 현손 승옥(勝玉)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에 부(賦) 3편, 시 85수, 권2∼6에 서(書) 131편, 잡저 12편, 기(記) 2편, 설(說) 2편, 발(跋)·명(銘)·찬(贊) 각 1편, 권7에 제문 16편, 고문(告文) 1편, 애사 1편, 묘지명 8편, 행장 3편, 유사 2편, 부록으로 가장(家狀)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이 책의 주류를 이루는 부분으로 학문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그 중 〈상성담송선생 上性潭宋先生〉은 스승 송환기(宋煥箕)에게 보낸 것으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등 성리학적 문제를 비롯하여 예학(禮學)과 경의(經義) 해석에 관하여 광범위하게 질문하고 있다.

〈여정맹문규환 與鄭孟文奎煥〉은 정규환에게 보낸 것으로, ≪대학≫과 ≪중용≫의 해석을 비롯, ≪태극도설 太極圖說≫과 기삼백도수(朞三百度數) 등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

〈이기원류시제손문생 理氣源流示諸孫門生〉은 이기설의 원류에 대하여 밝힌 글인데, 본원(本源)과 품부(稟賦)에 따라 이기의 선후(先後)가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설의 〈사칠설 四七說〉은 성(性)이 발하여 정(情)이 되고, 심(心)이 발하여 의(意)가 된다고 한 쌍봉호씨(雙峰胡氏)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또한, 〈삼선생이기설 三先生理氣說〉은 주희(朱熹)와 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의 이기설이 일치함을 밝힌 글이다. 그 밖에 잡저에는 하도낙서(河圖洛書)에 대한 해설인 〈하락해 河洛解〉, 장주(莊周)의 ≪남화경 南華經≫ 일부를 주해한 『소요유해 逍遙遊解』가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창백집 표지

조선후기 학자인 창백(蒼栢) 박종열(朴宗說)의 문집으로 현손 박승옥이 간행하였으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 전남대, 원광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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