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공 에 관한 글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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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22 22:33 조회4,703회 댓글0건본문
연암공에 관한 글을보고
나이가 이제 겨우 고회에 눈이 침침하고 신문이나 책 잔글씨를 읽으면 눈이충혈되고 눈물이나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글을 쓰면 띄어쓰기 국문 받침도 제대로 못쓰는 자가 글 올리는 것도 조심 스럽고 종중 홈페지 도 이전(以前)같이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고 출입도 될수 있으면 삼가고 있습니다. 저 자신이 너무 무식 하고 부족한 것이 많음 을 늦게야 알고 젊은시절 부지런히 독서하고 배우지 않음을 후회하나 떄 는 늦었습니다 그래도 홈페이지 에 들어가 보면 황당스런 글도 접하게
되나 반론을 제기 하지 못하는 늙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같습니다
연암조부가 오래동안 살던 집이 협소 하고 수리하고자 했으나 지방 수령으로 발령나 포기 하고 경기 관찰사로 발령나 미르고 연암공
출생한 집터는 조부 행장 비문에 도성 서쪽 어디라고
가까운지인에 문집 행장에 서 본것 같습니다.
연암 년보는 1900년도에 휘김택영에 열하일기 해 체에 있는것 같고
연암 부친(父親) 휘사유에 대한 설명은 제자 청풍김 윤식(允植) 그집안사람이 찬한 비문 행장 호 환재 휘 박규수 행장에 과언독행(過言 篤行) 경신 독실(敬愼 篤實) 문사삼창(文詞 삼 暢) 말이없고 행동은 잘 드러내지 않으며 글은 넉넉하고 화창 했다고 기록 하고 있으며
자손에 귀현(貴顯)으로 이조판서에 추증 기록한다고 하니 증손자 환재 형제가 아닌가 생각 하고있습니다
연암공 둘째아들 휘 종채 에 과정록도 훌륭한 문학 작품이며 뛰어난 문장이라고 저는 생각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입니다 정다산 휘 약용에 맏아들 학연 둘째아들 학유가 아버지 다산을 상세히 기록한것 과 같습니다
허생전은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중에 허생이야기를 허생전 으로
7월에 호랑이 이야기를 호질로 분리해서 단편화 한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전 연세대학교수 학술원회원 이가원 뱍사가 춘향전 구운몽등 호질 허생전을 중국에 까지 소개 한걸로 알고있습니다
옥갑야화에 허생전은 집권 노론 시파에 경세 치론(經世 治論)을 비판한 글같고 역관 홍순언 이야기는 미천한자도 얼마든지 후세에 이름을
남길수 있고 호질은 학자와 수절 여를 비꼬은것 같습니다
박필몽 박필현 형제 이야기는 과분한 허욕으로 폐가망신 하고 문중 종중에도 큰 피해준 사건을 경개한 글 같습니다 박필몽과 연암 조부 휘필균과는 12촌간이며 연암과 그후손과 는 16촌임니다 당색도 연암집은 집권 노론 벽파이고 필몽 필현 형제는 반성부원군파 강경 소론집 입니다 이사건에 가담한 종친들은 지금도 조상도 잘알지못하고 방랑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 하고있습니다 연민 이가원박사는 퇴계 이황에 14대손으로 안동에서 출생 일본 침략으로 종가집을 방화 집이 불타자 영주 줄포 라주정씨 외가에와서 글을배우고 성장하시고 영주농고에서 한때 교편을 잡으시고 퇴계 후손 들은 일본놈들에게는 배우지 말라고 일본놈에게는배운 사람이 별로 없다고 퇴계집에서 시집오신 백모(伯母)님이 소학교라도 가서 배우고 싶어도 어른들이 못 다니게 했답니다 이름도 가원(家源)퇴계학 가통을 잇고 공부하라고 지었다고 함니다 평생 연암을 연구하시고 조선에 누구 누구 문장가라고 하나 연암을 앞설자는 없다고 하신 말씀 이생각남니다 연민은살아생전에 조금만 더 겸손했으면 더 이름을 남겨을텐데 하는 아쉬음이 남습니다
연민 은 저의집과 척위가 있고 오랜세교(世交)가있는 관계로 저는 잘알고있습니다 초기에 연암연구를하자 주손인 휘영범대부 께서 연암문집 필사본등 귀중한 자료를 명륜동 연민댁에 싫고와 맡기고 연구에 협조했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당시는 성균관대 교수로 계실때라고 합니다 이귀중한 자료들이 제대로임자를만나 연구해서 지금도 후학(後學)들이 연구할수 있도록 해주신 고마운 은헤는 우리 종중은 잊지말길 바랍니다 단국대학 동양연구소에서 2010년 2월5일 귀중한 품목중에
칠사고 를발견 각대학 젊은 교수들에 열띤토론 을보고 안동 하회 북촌댁 유이좌(柳 台佐)참판댁 전도유사 유택하 웅이 80세를넘긴 나이에 안동 원로들과 젊은 대학생들과 경청하시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부럽게
생각하고 젊은 교수들에게 우리 종중일을 묻고 있으니 부끄럽게 생각한 하루였습니다 연민은 이외 다산 정약용 초정 박제가등 많은귀중본을 몽땅 연구소에 귀증하고 작고하셨고 아들이 벼루하나라도
남기자고 해도 거절했다고 합니다
연암댁도 혈손(血孫)은 없고 양자로 대를잇고 주손댁은 유물이 남은것이없다고생각 하고 있습니다
연암 조부 휘 필균은 종형 여호 휘필주가 손이없어 차남 사근 을 양자로줌 연암 조부와 여호는 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여러 종반들이 우애와 효친(孝親)은 도성사람들은 다알고있는 명문가로 알고있읍니다
여호는 집이가난해 누구에게 배우지 못하고 절로다니면서 홀로독학해
사서를만번이나 독파하시고 과거공부가 아닌 심학을 공부해 낙론에 대표적인 징사(徵士)로 피증관으로 징소되 이조판서또 이상까지승진 하신분이고 연암조부와 종반이 공경에 반열에 올라도 끼니을 걱정하고 협소한 집에서 산 청빈에 표상이 였다고합다
여호문집 원본은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에 있는 것을 어느 출판사 사장이 영인해 영인본이 시중에 나돌고 이었고 고전번역원에서 알고 국역 순서를 기달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귀중한 문집이 한 두권 없다고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니다 저가 옛날에 본 기억 나는것은 졸현공 묘지명등 우리 종중에 귀중한 많은 자료가 있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피증관은 우리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에서도 보았고 문헌록에도 에도 있고 80년대 판관공파 도유사 용준 씨 께서 만든 고양 덕동 실기에는 설명까지 되있는데도 우리것도 살피지 않고 남에게묻고 별소리를 다하는 우(愚)는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泳)자를 승(勝)자로 개명하신 삼종조 진사 승진 초명은 영진(泳振)호구단자에 개명(改名)하신 사유가 있는것같은데 찾아보는 중임니다 호구단자는 지금 주민 등록과 같아 한부는 영주군에 보관하고
한부는 본인이 보관해 군수 수결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음 소고집것은
오래된 것도 보관되 지금도 영주 소수서원에서 특별전시중이고 도망간
노비도 기록되있는 걸로 알고있습니다 개명 사유는 매천야록과 같다고 알고있습니다 매천황헌은 당대에 의사(義士)로 자손들에게 공개 하지 말라는 비서이고 한일합방이 되자 절명시 식자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는 시를남기고 아편을 먹고 자살한 그당시는 대표적 식자입니다.
그리고 조상자랑 하는것은 팔불출이라고 하는 분이 있는것 같은데 이런말은 금시 초문이고 마느라 자식 자랑하는 사람이 팔불출로 알고있습니다 훌륭한 조상은 삼대를 추증 밭게 하시고 자손들에게는 음사로
벼슬길도 열어 주시고 종중도 이런 조상들로인해 명문이되고 지금도 조상덕에 우리가 큰덕을보고 있습니다 한예로 충무공 후손중엔 사형에 해당 하는 국사범도 사면 밭은 사건이 있습니다
여호 연암가문은 너무 청빈해 너무 맑은 물에 고기가 쎄끼를 칠수없는이치와 같아 양자로 대를잊고 환제 같은 분은 대제학으로 정승으로 종묘 까지 배향된 인물로 노원(중계동)도시 계획으로 충청도 보은으로 이장 사진을보니 비석 하나없는데 여러젊은학자 들이 관심을갖고 연구중 이라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졸현공 오창공으로 내려오는 가문은 외로운 충성과 곧은 기개가 우뚝하고 잘난 자손으로 인해 추증(追贈)되는 경사가 거듭되고 효(孝)와 우애(友愛)와 청빈(淸貧)함을 최고에 가치로 삼아 타 문중에 사표(師表)가 됨으로 여기에 소개합니다. 인천서 찬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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