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난리 와 개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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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우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10-05-03 10:27 조회4,171회 댓글0건본문
노인 난리 와 개감역
1890년경에(甲午更張前) 閔泳駿이 상소하여 古禮를 실행하지 아니하여 풍속이 퇴폐하고 東學亂 이 일어났습니다,하니 이에 임금이 鄕約 과 鄕飮酒禮를 행하도록 命하였다
1), 노인난리
이때에 지방 각 郡縣에서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조사해서 쌀과 고기를 내리고 壽職(오래산다고 대접하여 내리는관직)을 따저서“通政大夫”니“嘉善大夫”등의 帖을주며 돈 30緡(민)을 거뒀는데 그의 자손을 잡아 가두고 독촉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농촌 구석의 노인들은 빛을 내어 꾸어다 물었으니 이것을 가리켜 “노인난리”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때에 받은 첩지를 근거로 하여 묘소에 “嘉善大夫 某公 之墓”라 써서 비석을 세우고 또 족보에 기록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2), 개감역 (狗監役)
충청도 어느 연안지방 강씨집에 과부가 혼자 살았는데 나이가 많았다 집은 다소 여유가 있었으나 자녀를 하나도 두지 못했다 개한마리를 기르며 살아갔는데 그 개의 이름을 복구라고 불렀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福狗(복구)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남자의 이름인줄 알고 드디어 姜福九(강복구)라는 이름으로 監役(감역=감역관의 약칭,조선때 선공감에 두었던 종9품관직)에 勒差(늑차=강제로 뽑음) 되었으며 索價 (색가=얽혀진값)가 정해젔다 그 감역에 임명된 값을 받아가기 위해 사람이 찾아오자 과부는 어처구니가 없어 하며 “객은 복구를 봐야 하겠느냐 ?”하고 소리를 내여 크게 부르니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이르렸다 “객도 또한 크게 우스며 돌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湖西 지방에는 개감역(狗監役)이 있다는 소문이 났으니 기타 일들의 경우도 가히 추측할수 있으리라,,,모던사람들이 이러고도 어찌 나라가 보존 되리오 하였다고 한다 ,,,
(梅泉野錄에서) 庚寅,立夏節에,朴元雨,調査整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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