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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공. 박태보.(朴泰輔)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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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춘서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10-03-27 05:32 조회4,3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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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朴泰輔) 설화 apcnfl12 2008.08.16 12:18
조회 199 박태보가 노강서원(鷺江書院)에 모셔진 일과 관련 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공(西溪公)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부친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으므로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그러나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하니, 박태보는 [[오두인]], [[이세화]], 등 80여 명과 궁궐에 나아가 상소했다. 박태보가 상소문을 직접 수정해 써서 갖고 가 올리니, 왕이 대로하여 밤중에 대신들을 다 소집하여 형벌기구를 갖추고 국문하기 시작했다. 먼저 오, 이 양 공을 심문하고 이어 박 공의 국문에 들어갔다. 화형과 압슬을 가하고 노끈으로 목을 묶어 다리에 붙여 동여 매고, 세지도 않고 매를 치며 입을 막대기로 수없이 치게 했다. 그러고는 지만(조인이 오래 속였음을 자백하고 용서 비는 일)을 강요했다. 그러나 박 공은 아프다고 소리치는 일이 없었고,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박 공은 "성상께서 이러시면 망국지주가 됩니다." 하니, 왕은 "내가 망국주가 되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하고 화를 냈다. 박 공은 "성상께 거짓말로 지만하면 지하에 가서 귀신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니 거짓으로 자복할 수 없습니다." 하고 끝끝내 지만하기를 거부했다.

     날이 밝으니 왕은 지쳐 들어가고, 또 밖으로 끌고 가 계속 형벌을 가하게 했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고 거의 기절했는데, 누군가가 미수(오늘날 '미숫가루 탄 물') 한 그릇을 가져와 마시게 하니 정신이 좀 들었다. 다시 형벌이 시작되어 몸이 온통 허물어졌는데, 박 공응 의식을 잃었다. 형벌이 끝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펴보니 가슴에 온기가 있었다. 곧 천을 찾아 부수어진 다리를 동여매는데, 뼈와 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박 공이 이리저리 지시하여 묶을 수가 있었다.

     왕이 다음날 다시 국문하려 하니, [[권대운]]이 불가함을 아뢰어 국문을 그치고, 진도로 유배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귀양길을 떠나는데 사람들이 구름 모이듯 했고, 노량진에서 부친을 만난 뒤 곧 숨을 거두었다.(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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