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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남일공 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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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profile 박종서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09-12-02 16:32 조회3,510회 댓글0건

본문

지난 11월 28일(음력 10월 12일) 남일공(南逸公) 시제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포 시제, 합천 시제에 연이어 참석하시어 피곤한 가운데에도 불구하고 교통도 편하지 않은 南逸公(諱 應男) 묘소까지 찾아 주시어 悚懼스럽습니다.

執禮를 맡아 제례를 진행해 주신 梧窓公后 旻緖, 祝官을 맡아 讀祝하신 葯窓公后 贊赫, 亞獻官이신 西溪公 宗孫 龍雨 내외, 終獻官이신 梧窓公 宗孫 滿春 내외, 安養支會長이신 護軍公后 先陽, 活塘公后 贊旭, 漢雨, 葯窓公后 甲緖, 都事公后 仁緖, 參奉公后 玟雨, 南郭公后 時雨 그리고, 늘 수고해 주시는 大宗中의 太緖 형님을 비롯한 우리 남일공파의 여러 종원님들 감사합니다.

끝으로 특별히 西溪公 宗孫 龍雨 내외의 안내로 멀리 日本에서 參禮하신 日本 國立民族學博物館 助敎이신 太田心平(오타 심페이)博士(人間科學)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南逸公后 宗緖 拜上



♣ 박응남 [朴應男, 1527~1572]
자는 유중(柔仲), 호 남일(南逸), 퇴암(退庵)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성제원,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고 사가독서하였으며
, 이후 승정원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가선대부의 품계가 될 때까지 대사헌, 승정원, 육조의 참의 등 많은 청요직을 거쳤다. 강직한 성품으로 대사간에 있을 때 간신들을 탄핵하고 현신들을 등용시켜 명종 말기, 선조 초에 바른 말을 잘 하기로 이름 높은 간관(諫官)이었다. 시호는 文貞이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1. 문강공(文康公) 후(諱) 소(紹)의 셋째 아들로 명종조 호당(湖堂)에 선발

☞ 湖堂(賜暇讀書)은
중종조 11세 嘯皐公 휘 承任,
명종조 12세 南逸公 휘 應男,
인조조 14세 仲峰公 휘 漪,
숙종조 16세 定齋公 휘 泰輔,
영조조 20세 文貞公 휘 宗甲


2. 국조명신언행록(國朝名臣言行錄, 朝鮮朝 초에서부터 孝宗때까지의 名臣 163명에 대한 기록)에 명신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 국조명신언행록에 등재된 분들은
     11세 文康公 휘 紹, 12세 文貞公 휘 應男, 鼎山公 휘 炯, 13세 活塘公 휘 東賢, 梧窓公 휘 東亮

3. 1557년 수은어사(搜銀御史)로 평안도에 다녀옴

4. 형 응순(應純)의 딸을 왕비(선조비 懿仁王后)로 천거
인순대비는 왕비 선택을 심의겸에게 일임했다.
심의겸은 곧 대비 앞을 물러나와 자기 당파 사람들과 의논했다. 되도록 자기와 가까운 사람하고 국혼을 시킬 생각인데 좀체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친구 박응남(朴應男)이
“우리 형님 딸이 어떻겠소? 우리 집안은 세력을 부릴 만한 사람이 없으니 좋지 않겠소?”
하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대개 여기에 찬성했다. 심의겸도
“그럼, 어디 그렇게 해봅시다.”
하고 그 길로 누님 인순대비를 찾아가 박응남의 형 박응순(朴應純)의 딸을 천거했다. 이리하여 곧 박씨가 왕비에 책봉되고 심의겸의 지반도 더욱 공고해지게 되었다.

5. 嘯皐公 휘 承任이 撰한 5세 文正公 휘 尙衷의 墓碑를 쓰심.

6. 명종 19권 10년 12월 14 일 (갑진) 검토관 박응남이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는 것에 대해 아뢰다.
상이 소대하였다. 검토관(檢討官) 박응남(朴應男)이, 옛날 사람은 자식을 낳아 미리 가르친다는 말을 논하다가 이어서 아뢰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독서(讀書)하는 것으로 구속(拘束)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젊을 때의 습성(習性)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習慣)이 되면 자연(自然)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양육될 때에 날마다 단아한 사람과 바른 선비와 함께 거처(居處)하게 하면, 익히는 것과 보고 듣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음탕하고 사특한 것을 끊어 저절로 성취됨이 있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예전에 태자(太子)가 태어난 지 3일만에 유사(有司)가 예복을 갖추어 남교(南郊)에서 뵙고 대궐을 지나게 되면 말에서 내린다.’고 하였습니다. 말을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할 때부터 현명한 사람과 단정한 인사를 접하게 하여 충신(忠信)과 효제(孝悌)를 가르쳐 사악한 행실을 보고 듣지 않도록 하면 저절로 습관이 될 것이니 비록 착하지 않은 짓을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7. 卒記 (經筵日記 二)
선조 5년(1572) 9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박 응남(朴應男)이 죽었다.
     응남은 우직하여 말을 과감히 하고, 겉으로는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 여러 번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기탄없이 논박하므로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착한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착한 무리가 존경하여 따랐고 또 왕비의 숙부이므로 상이 총애하고 사림(士林)이 힘입더니, 그가 죽으매 사류들이 애석하게 여기었다.

8. 박응남묘표(朴應男墓表)
     이 비는 1733년(영조 9년) 경기도 의왕에 건립된 박응남묘표(朴應男墓表)로 종후손(宗後孫)인 박필주(朴弼周)가 비문을 지었고, 6대손인 吏曹判書 박사수(朴師洙)가 세웠다. 전면의 글씨는 당나라 시대의 명필인 안진경(顔眞卿)의 글자를 집자하였으며, 후면의 글씨는 고려 시대의 명필인 유공권(柳公權)의 글자를 집자하였다.
현재 탁본은 명지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실록기록>
--<조선왕조실록>--
명종10 7/9     박응남(朴應男)을 정언으로,
명종11 .8/25    朴應男)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부수찬; 종6품>
명종11 10/12    병조좌랑
    12 1/29    정언 박응남(朴應男)이 아뢰기를,
명종12 2/13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삼았다.
         4/8 박응남(朴應男)을 수찬으로,                 <수찬; 정6품>
         5/28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정언; 정6품>
         6/8 정언 박응남(朴應男)이 숙배(肅拜)하였다. 전교하기를,
명종12    7/2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
         7/11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수찬으로 삼았다.
         8/27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좌랑으로,             <병조좌랑; 정6품>
         10/28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13 5/29 박응남(朴應男)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14 9 25 박응남을 吏曹 正郞으로 삼다             <이조정랑; 정5품>
     15 6/11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검상으로,            <검상;     정5품>
     15 10/4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사인으로,
     16 4 2 박응남(朴應男)을 사복시 부정(司僕寺副正)
명종16    4 28 박응남(朴應男)을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사복시정
명종16    5 8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명종16    6 28 박응남(朴應男)을 內資寺 正으로
명종16    9/28 박응남(朴應男)을 의정부 사인으로
명종16    11/5 박응남(朴應男)을 홍문관 직제학으로
             영사(領事:정1품)․대제학(정2품)․제학(종2품) 등은 모두 타관(他官)이 겸임하였으며, 직
제학(정3품)도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가 겸하였고, 응교(정4품)는 홍문관(弘文館)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명종17     7/21 박응남(朴應男)을 동부승지로,                 <승지; 정3품 당상관>
명종17     9/5 박응남을 우부승지로
명조17     9/18 박응남(朴應男)을 좌부승지로
                                                        
명종18 8/28 박응남(朴應男)을 승정원 우승지로,
     10/7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특지(特旨)이다.】, <대사간; 정3품>
     12/22 박응남【청렴하고 근신하여 마음씀과 행동을 바르게 하려 했지만 고집스럽고
         편벽된 잘못이 없지 않았다 지난날 이양 등의 미움을 받아 거의 쫓겨날 뻔했다.] 을 승정
원 우승지로,
명종19 2/17 박응남(朴應男)을 좌승지
     6/1 박응남(朴應男)을 호조 참의로
     7/20 박응남(朴應男)을 우승지로, 우승지
명종20 2/25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5/21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참의로 삼았다.
     10/19 박응남(朴應男)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명종20 11/17 대사간 박응남(朴應男),【보덕(輔德) 박소(朴紹)의 아들이다. 겸손하고 신중하며 말이 적
었다.조행이 단정하며 돈후하고 검약해 사치를 하지 않았고 취향도 정직했다. 성품이 매우 확고해 남을 따라 좌우하지 않았다. 단지 인색해서 궁핍한 친족이 있어도 돌보아 주지 않아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輔德; 세자시강원에서 경사와 도의를 가르침

명종20 11/18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참의로,
    21 1/21 박응남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명종21 3/28 박응남(朴應男)을 병조 참지로. 좌승지.대사헌.부제학.
     6/7 박응남(朴應男)을 이조 참의로, <참의; 정3품 당상관>
     11/13 박응남(朴應南)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부제학; 정3품
     12/6 홍문관 부제학 박응남(朴應男)【몸가짐을 삼갔고권세를 좇지 않았으며묵묵히 스스로를
지켰으나 연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
22 3/14 박응남(朴應南)을 좌승지로,,
     4/20 박응남【입지(立志)가 확고하여 권요에 아부하지 않고 염정으로써 몸을지켰으므로, 사론이 아름답게 여기었다.】을 이조참의로,
     6/6 박응남을 승정원 좌승지로,
선조0 10/30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헌; 종2품.>
    1 4/30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으로 이중호(李仲虎)를 사간으로,
     8/12 박응남(朴應男)․을 참찬관(參贊官)으로
     10/4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으로,
    2 8/23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에
선조4 10/14 대사헌 박응남(朴應男)이 병으로 체직되었다.
    4 11/2 박응남(朴應男)을 부제학에,
     11/3 박응남․천문도(天文圖)를 하사받았다.
     11/25 박응남(朴應男)을 대사헌에,
선조5 9/24(정묘)    도승지 박응남(朴應男)이 졸서(卒逝)하였으므로 상이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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